피뢰침 총리(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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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통령제 아래서 총리가 하는 일은 피뢰침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정치학자가 있다. 구름이 몰려오고,천둥이 치고,비 바람이 쏟아질때 피뢰침은 먼저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충돌을 흡수하고,완화시키는 구실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출신의 오가기 저 『수뇌론』에 나오는 얘기다. 그는 중국사회과학원 정치연구소 소장을 지내다가 지난 89년 천안문사태때 프랑스로 망명한 학자다.
「피뢰침」총리는 그러나 몇가지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오교수는 세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복종.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인물을 말한다. 그점에선 이골이 나 있는 인물이 많아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닌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의 명령이 건전한 철학과 합리적인 사고방식,확고한 신념위에 놓여 있을 때의 얘기다.
둘째는 위엄. 상당한 위세와 명망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권에서도 그의 임명을 군소리없이 받아들인다.
셋째는 재능. 행정을 좀 알고 여러 정치세력들간의 갈등과 마찰을 어느정도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쉬워도 그런 인물이 진작 있었으면 우리 현실이 이렇게 황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긴 그런 인물을 찾아내는 도량과 식견을 가진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차라리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의 주문이 우리에겐 훨씬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그가 일찍이 총리의 조건으로 꼽은 것 가운데 「평범한 재능」이나 「건전한 판단력」까지는 누구나 생각이 미치는 얘기지만,그는 여기에 「운」이라는 조건을 하나 더 붙였다.
난데없이 운명론을 펴는 것 같지만 6공들어 운이 좋은 지도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세계를 놀라게한 서울올림픽을 치른 일도,그 절벽같기만 하던 소련과 국교를 트고,두나라 정상이 오간일도 불과 며칠사이에 우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 흐뭇한 일들을 순식간에 휩쓸고 지나가는 폭풍같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았다.
새로 들어설 총리나 각료는 다른 것은 몰라도 운이라도 좋아 국민의 마음을 좀 편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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