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미안해 흰 고무신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서울 종로5가의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섰다. 지하상가에는 한복 집들이 즐비하다. 쇼 윈도에 진열된 한복들은 금방이라도 비상하려는 잠자리의 날개처럼 가벼워 보인다.

몇 집을 지나치니 이번에는 고무신 가게 앞이었다. 각양각색의 무늬에 앞 코를 높이 올린 고무신과 뒤축을 높인 신식 고무신들. 모양은 화려한데 왠지 낯설다. 신기한 듯 신식 고무신을 만져 보았다. 그때 선반 맨 아래칸 구석에 비닐봉지에 쌓인 하얀 고무신이 눈에 띄었다. 화려한 고무신에 밀려 초라한 모습이었다.

잊고 지내던 오래된 흑백 가족사진 한장이 생각났다. 사진 속의 어린 소녀는 단발머리에 흰 저고리, 검정 치마에 고무신을 신고 있다. 내 어릴 적 모습이다.

오일장이 서는 날,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졸라서 산 새 꽃신에서는 석유냄새가 났다. 야들야들한 고무신의 감촉이 보드랍게 나의 맨발을 감싸면 날아갈 듯 동네어귀로 내달렸다. 느티나무 아래 공터에는 친구들의 고무줄 놀이가 한창이었다. 폴짝폴짝 한참을 뛰다보면 고무신은 어느새 땀으로 젖어 미끈거리고 찌그덕 소리를 냈다. 그러면 허공을 향해 고무신을 냅다 벗어던지고 맨발로 고무줄을 넘나들었다.

이런 기억들 틈에서도 남동생의 하얀 고무신에 얽힌 추억은 남달랐다. 내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여동생과 남동생이 방학을 이용해 서울 구경을 왔다. 약국을 운영하던 큰언니는 "내가 바쁘니 네가 동생들 데리고 만화영화도 보여주고 고려당 도넛도 사 먹이고 하렴"하며 넉넉한 용돈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런데 나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언니가 몇번이나 물어와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큰언니의 성난 목소리와 동시에 내 등덜미를 세차게 내리치는 매운 손맛으로 내 몸은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내가 네 마음을 모를 줄 아니. 너, 동생들 촌티난다고 데리고 다니기 싫어서 그렇지."

언니는 내 마음을 귀신같이 꿰뚫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두 동생을 이끌고 대한극장으로 향했다.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동생들의 기분은 한껏 들떠 있었다. 영화제목은 '신데렐라 공주'였다. 마음씨 착한 신데렐라가 행복해지는 장면을 보고 난 후, 나는 내 행동이 은근히 부끄러워졌다.

나는 서둘러 고무신 가게 앞을 떠나 전동차를 타러 갔다. 전동차 안에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수많은 발에 신겨진 신발 중에서 고무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동차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지나온 세월을 느껴본다. 빈 자리에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으니 나는 어느새 고향의 푸른 강가에 서 있다.

최성옥(서울시 도봉구 쌍문동.53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