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종철 20주기에 돌아보는 민주화와 386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20년 전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운동권이던 서울대 3학년생이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그의 죽음은 중앙일보 보도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으며 5공 독재에 대한 국민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분노는 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폭발했다. 한국 민주화 20년의 시발점은 박종철이었다.

20년 동안 많은 것이 이뤄졌다. 대통령 직선제, 여야.지역.세대 간의 정권교체, 검찰.경찰.국정원 등 이른바 권력 기관들의 괄목할 만한 변화, 노조 활동의 만개(滿開), 정경유착의 급감, 세계 수준의 언론 자유…. 박종철이 없어도 우리가 달려 왔을 길이라지만 박종철로 인해 우리는 시간과 희생을 줄였다.

20주기에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박종철이 원했을 민주화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제도는 갖추었다지만 내실에서 우리는 여전히 홍역을 앓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정점으로 삼은 현재의 민주화 세력은 건국.산업화 세력이 이뤄 놓은 업적을 무시하면서 독선으로 치달아 왔다. 그들은 어설픈 탈레반식 개혁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민주화를 민족자주나 반미친북이라 맹신하는 엉성한 세력은 남한의 이념무장 체계를 들쑤셔 놓았다. 87년 민주화 투쟁으로 개화한 노조운동은 20년이 된 지금도 현대차 파업에서 보듯 유아기적 떼쓰기로 산업현장을 뒤흔들고 있다.

386은 또 어떠한가. 살아 있었다면 386세대로 불렸을 박종철은 386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쥐어 보지도 못하고 386이어서 감수해야 했던 시련만 겪고 떠났다. 그가 없는 공간에서 이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선 386들은 오만과 부실로 역사의 흙탕물을 잔뜩 튀겨 놓았다. 잘 모르는 대통령은 그들의 어깨에 얹혔고, 대통령을 '도구'라 표현했던 386들은 지지율 10%대의 초라한 대통령과 여당을 만들어 놓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박종철의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면서 "아버지는 할 말이 없데이…"라 했다. 지금 하늘에서 박종철이 "할 말이 없다"고 하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