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우리 정당들은 돈 뜯는 조폭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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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손길승 SK그룹 회장의 대선자금 관련 발언은 정치권의 파렴치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孫회장은 그룹 간부 연수 강연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표적사정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 바람에 (1백억원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또 재계 고위 관계자들에게 "민주당에 SK그룹 계열사들의 연간 정치자금으로 제공할 수 있는 25억원을 모두 줬는데, 노무현 후보 측 이상수 사무총장이 더 달라고 해 또 25억원을 만들어줬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정치권은 기업에 불법 대선자금을 강요한 것이며, SK는 약점 보호를 위해 정치권에 거액의 '보험금'을 내온 셈이다. 조폭 같은 정당에 유흥업소 같은 대기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정치의 중심축인 정당과 국민경제의 큰 몫을 맡고 있는 대기업의 관계가 이런 수준인데 나라 꼴이 제대로 될 리 있겠는가. 검찰이 孫회장의 발언을 철저히 규명해야 하는 이유다.

孫회장은 또 DJ정권 시절 민주당엔 1백40억원을, 한나라당엔 8억원을 줬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정치자금은 여야에 6대 4 비율로 제공하는 것인데 17대 1로 편향해 줬으니, 한나라당이 섭섭해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표적사정'운운하면서 협박했다면 공갈배의 행태와 다름없지 않은가. SK로부터 추가로 25억원을 내놓으라고 했다면 盧후보 측 선대위도 할 말이 없게 된다.

대선 과정에서 당을 장악하고 있던 구주류가 민주당에 건네진 25억원을 선대위에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정황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네들의 사정일 뿐, 기업으로서는 이중으로 돈을 뜯긴 것이다.

"지금껏 정권이 바뀔 때마다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해왔는데 이번엔 386 검사들의 변화를 못 읽은 것이 큰 문제가 됐다"는 孫회장의 발언도 기막힌다. SK는 정권과 검찰에 로비해 버텨왔다는 것인가. 孫회장은 공개적으로 실체를 고백해야 한다. 또 한나라당과 盧후보 측 선대위는 구구한 변명이나 늘어놓지 말고, 불법 대선자금 관계자들을 당장 검찰에 출두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