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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대법원장 발언 … 말이 씨가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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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9시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 들어서는 이용훈 대법원장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기다리던 기자들에겐 "당사자(사건 의뢰인)가 동의한다면 (변호사 시절) 수임 액수까지 모두 공개할 수 있다"는 말을 던졌다. 변호사 시절 세금신고를 누락했지만 고의가 아니었고, 돈에 관한 한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표명한 것이다.

전날에도 이 대법원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신앙인으로서 속인 적이 없다" "통장이라도 보여주겠다" "언론에 섭섭하다" 등 거침없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번 '세금 탈루 파동'은 지난해 11월 본지 기자에게 "10원이라도 (탈세)했다면 직(職)을 그만두겠다"고 한 발언(2006년 11월 19일자 1면)이 화근이었다. 5000만원의 소득에 대해 세금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의 발언이 거짓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말이 씨가 된 셈이다.

이 대법원장의 말이 구설수에 오른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2005년 9월 취임한 이 대법원장은 열린 법원을 표방했다. 전임 대법원장들은 점심 식사조차 사무실에서 하며 외부 접촉을 자제하는 '고독한 수도승' 같은 생활을 했다.

반면 이 대법원장은 "판사들은 물론 각계 인사를 만나 사법부의 나갈 방향을 듣고 사법 개혁에 반영하겠다"며 적극적이었다.

지난해 2월 고위 법관 만찬에서 "두산그룹 비자금 사건은 사법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였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라고 말해 재판권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법원장이 변호사 시절 수임한 사건의 70% 정도가 화이트칼라 범죄였다는 역비판도 나왔다. 이후에도 "검사의 수사기록을 던져버려라"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는 사람을 속이려고 말로 장난치는 것" 등의 말이 이어져 법조계를 요동치게 했다.

이 같은 대법원장의 행보에 대해 한 중견 판사는 "대법원장 스스로가 검증 대상이 되고 법원의 개선 방향을 공개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전향적"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대법원장의 언행이 돌출적이고 파격적이어서 불안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 대법원장의 말이 법조계의 신뢰성에 타격을 주고 있다"고 한 변호사는 지적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거친 '말 폭탄'에 시달리고 있다. 대법원장 지위에 걸맞은 진중하고 세련된 말을 기대해본다.

문병주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