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10㎝ 더 뛴 후쿠도메의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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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이 오른쪽 외야로 향했다. 지난 7일 한.일전. 2회말 김동주(두산)가 때린 타구는 담장을 향해 쭉쭉 뻗고 있었다. 타구의 궤적을 좇던 시선은 담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본 우익수와 마주쳤다. 후쿠도메 고스케(26.주니치)였다. 후쿠도메는 한국 야구의 희망을 품고 날아오는 그 타구를 정확히 예측했고 타이밍을 맞춰 훌쩍 뛰어올라 잡아냈다.

그리고 그 순간 한국에서는 탄식이, 일본에서는 환호가 터져나왔다. 두 나라 야구의 명암을 정확히 갈라놓은 수비였다. 타자 김동주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2루에서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 타구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딱 한뼘 정도의 차이로, 한국은 올림픽 예선에서 탈락했고 일본은 아시아 야구의 정상에 섰다.

한국 팬들은 "후쿠도메의 점프가 조금만 낮았어도…"라고 말했지만 올 시즌 후쿠도메를 지켜본 일본 관계자들은 "저 정도 타구를 후쿠도메가 잡아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3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종범(기아)과 한솥밥을 먹으면서 수비 불안으로 주전에서 제외되곤 했던 '미완의 후쿠도메'가 아닌 '완성된 후쿠도메'였던 것이다.

후쿠도메는 2001년 시즌을 끝내고 '야구로의 청교도적 귀의'를 공개 선언해 화제가 됐다. 그는 야구를 잘 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술.담배.여자 등 자신의 야구를 괴롭히는 것들에서 철저히 벗어나겠다고 언론을 통해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부터 정말 진지하게 야구에만 매달렸다.

그는 야구 명문고 PL가쿠엔 시절부터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대표선수로 출전했다. 대형 타자로서 일본을 대표할 것이라는 주위의 기대 속에 99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고 선동열.이상훈.이종범 등과 함께 팀을 센트럴리그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타율 0.284의 유격수로서 충분히 자신의 이름값을 했다.

그러나 2년째부터 그는 헤맸다. 수비가 불안하자 타격도 흔들렸다 2000년 0.253, 2001년 0.251의 타율. '발전'이 없었다. 후쿠도메답지 않았다. 그때 그가 선택한 것이 '청교도적 귀의'였다. 신념.소신 모든 것을 바쳐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세상에 알렸다.

'금욕 선언' 이후 후쿠도메는 달라졌다. 외야수로 자리를 옮겨 수비가 안정됐고 타격도 살아났다. 무엇보다 야구에 진지해졌다. 1분, 1초를 모두 야구를 위해 썼다. 2002년, 그는 0.343의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최고 타자가 된 것이다. 그때 그는 자신의 1년을 돌아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2003년, 공격과 수비에서 그는 일본 야구 최고 선수가 됐다. 득점.출루율 1위, 타점 3위에 국가대표 5번타자. 한국전에서 2회말 기막힌 수비와 6회초 쐐기를 박는 2루타가 그의 몫이었다. 후쿠도메의 호수비,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엄청난 절제와 노력으로 자신을 채찍질한 결과 그는 10㎝를 더 높이 뛸 수 있었다. 그 수비 하나에서 진실한 땀방울의 위대함을 보았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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