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고단함 달래는 섬마을 시인의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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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작년 가을 새우잡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이틀 만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고향에서 올라와 계셨다. "어머니가 자꾸 가보자고 해서 불쑥 찾아왔다… 너, 혼자 사냐?" 누나도 어머니처럼 내 표정을 살폈다. 당연히 혼자 산다고 말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 달 전쯤 술을 먹고 있는데 이모가 전화를 걸어 혼자 사는 걸 탓하시기에 그냥 옆에 앉아 있던 여자 동료를 바꾸어주었고 그녀도 술김에 이모님, 이모님 하며 살갑게 전화를 받았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올라오셨고 방 안 꼬락서니를 보니 여자 흔적은 없고… 그날 밤 어머니가 놓고 간 짐을 정리하는데 여자 양말 몇 개와 바짓가랑이 짧은 트레이닝복이 가방에서 나왔다. 늙은 감나무도 싹을 틔우는 봄이다('봄' 부분).'

시인 함민복(44.사진)의 신작 산문집 '미안한 마음'(풀그림)의 한 토막이다. 책에는 이처럼 딱하고 아스라한, 하여 감히 '함민복스럽다'고 부를 만한 짧은 이야기 마흔 편이 실려 있다.

강화도에서 혼자 산 지 십 년. 어떤 이는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사는 마지막 시인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시단의 3대 주마(酒魔)라고 농 삼아 이른다. 하나 남들이 뭐라 하던 간에, 시인은 오늘도 동네 어민들과 고깃배에 오르고, 갯벌에 석양 늘어지면 노을 안주 삼아 소주잔 들이켜고, 어쩌다 시 한 수 지으면 출판사 등지에 내다 팔아 술로 바꿔온다.

'이모가 어머니 대신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귀가 잘 안 들려 직접 통화를 못한다. 그렇게 된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다.… "거기 괜찮니? 비가 많이 왔다는데." "어머니, 거긴 강화도가 아니라 필리핀이에요. 외삼촌 일본 놈들한테 끌려가 징용 산 남양군도요." 아침 뉴스를 보시다가 전화를 거신 것 같았다. 아마 보청기를 끼지 않고 TV 화면만 쳐다보시다가 큰물이 난 화면을 보시고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으셨던 것 같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잘못 알아들으셔도 보청기 끼고 전화도 거실 때가. 이젠 가는 귀를 점점 굵게 먹어 아예 통화가 되지 않으니('어머니의 소품' 부분).'

마흔네 살 막내 아들이 고향의 노모를 그리는 마음도 아릿하지만, 함민복을 가장 오롯이 드러내는 일화는 역시 1998년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을 때다.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고 술을 먹었다. 외환위기 때여서 상금이 없어졌고 하여 동(銅)으로 된 조각품을 부상으로 주었는데, 쌀로 한 서 말 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고 내가 중얼거린 말이 기사화되었다. 그 기사를 보고 쌀 세 가마니 살 수 있는 돈을 보내주셨던 신농백초한의원 님들 덕분에 보일러에 기름 두 드럼 넣고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다('사람들이 내게 준 희망' 부분).'

시 잘 짓는 시인은 여럿 알지만, 삶이 고스란히 시가 되는 시인은 몇 알지 못한다. 지난해 겨울 들렀던 동막해변 시인의 처소. 모진 외풍 쉼없이 몰아치던데, 어떻게 올 겨울엔 바람막이라도 튼실히 해놓았는지. 책 내고 받은 인세, 얼마라도 남겨놓고 술은 마시는지.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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