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는 곰이 넘고…/워싱턴=문창극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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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이 우리나라를 포함해 우방으로부터 걸프전 전비를 걷기 위해 벌이는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국제정치에서 힘이 정의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미 정부가 정식으로 나선 단계는 아니나 미 상원 세출위원회는 재정지원국들이 약속한 금액을 내지 않을 경우 이들 나라에 무기를 팔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까지 통과시켜 가며 돈을 빨리 내도록 압력을 넣고 있다.
독일 사민당은 전쟁비용이 재정지원국이 약속한 5백45억달러에 훨씬 못미치는 4백20억달러밖에 들지않아 미국은 전쟁덕분에 오히려 이익을 남기게 됐으니 독일은 더이상 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답변은 전쟁경비를 계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정확한 금액을 낼 수 없으나 결코 미국이 전쟁으로 이익을 남기지 않겠다는 말뿐이다.
그러나 미국의 속셈은 말과는 다른 것 같다.
우선 미 상원 세출위원회가 미국이 부담할 전비용으로 1백50억달러를 승인했는데 재정분담국이 약속금액을 다 낼 경우 이 돈은 사용치 않는 것으로 되어있다.
즉 미국 자신은 걸프전에 따른 추가부담을 하나도 하지 않겠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또 전쟁경비도 예상했던 것보다 쓰임새가 많아 비용을 계산하기 어렵다고 얼버무리지만 그 비용 계산이라는 것이 고무줄 같은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폐기처분 해야할 포탄을 값으로 환산해야 하느냐 여부는 차치하고 소소한 것까지 전쟁비용으로 잡고 있는데 놀랐다.
예를 들면 워싱턴시내 반전데모때 동원된 경찰의 비용,중동지역의 미국시민 철수비용은 물론 그들이 두고온 재산에 대한 보전비용,테러에 대비한 공공건물 경비비용,베이커 국무장관 등의 순방경비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돈이 미 의회가 승인한 1백50억달러에 포함되어 있으니 결국은 우리 정부가 내놓는 현금도 이 비용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재주만 부리는 곰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따질 수도 없는 것이 우리 정부나 지원국들의 사정인 것 같다.
특히 우리로서는 주한미군이나 대미 수출문제 등이 걸려 따지려들다가 오히려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입장이니 더 답답하다.
우리 정부가 처음에는 물자로 지원키로한 부분까지도 미국의 요구에 의해 현금으로 주어야 하게 됐으니….
강자 주도의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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