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양귀자<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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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신문을 읽을 때마다 나는 부고 난을 유심히 본다. 죽은 사람 밑에 나란히 기재된 유족들의 이름들도 꼭 훑어보게 된다. 모월모일모시에 한 목숨에 스러졌음을 알리는 문구들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고 그 몇 마디의 알림이 보여 주는 요식 행위는 번번이 죽음 또한 일상임을 또렷하게 인식시켜 준다.
얼마 전 뜻하지 않은 병을 얻어 꽤 오랫동안 병실에서 누워지냈다. 단조로운 병상생활이었지만 눈 덮인 흰 산이 가득 들어오는 커다란 참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범실의 창에선 겨울나무의 흰 산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시선을 아래로 깔면 지상의 공간들도 썩 갈 들어왔는데 오른쪽으로는 번잡한 시내 풍경이, 왼쪽 바로 창 밑으로는 어수선한 영안실 입구가 담겨졌다.
영안실 앞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음식을 담은 쟁반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는 아낙네들, 오랜만의 만남에 기꺼워하며 악수를 나누는 남자들의 건강한 손들, 공중전화에 매달려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처녀 등등.
5층의 내 병상에서는 소리는 잡히지 않았다. 그 모든 행동들은 무성영화의 장면들처럼 매우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언젠가는 남편의 등을 치며 깔깔 웃던 새댁이 영안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기 직전에 씹던 껌을 뱉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내 낸 고요하기만 하던 옆 병실의 할머니가 숨을 거두었다. 밤새도록 복도가 술렁이더니 점심시간 후에 약을 들고 온 간호사가 할머니의 임종을 알려주었다. 창 밖을 내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밤과 아침 동안 복도에서 서성거리던 가족들이 영안실 앞에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워 있던 할머니가 이제는 저 아래로 옮겨진 것이다. 내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동안 간호사가 중얼거렸다. 환자들은 영안실이 내려다보이는 서쪽 병실을 싫어한다고. 동쪽 병실이 비면 옮겨 달라는 환자가 많다고.
할머니가 영안실로 옮겨간 직후 옆 병실에 새 환자가 들어왔다. 저녁식사가 날라져 왔을 때 나는 부닥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숟가락을 쟁반에 내려놓는 소리, 침대의 스프링이 튀는 소리, 웅얼거리는 낮은 목소리들을 가려 들으며 나는 잠시 멍하니 내 몫의 저녁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로 전에 한 생명이 질긴 삶의 줄을 놓고 하늘로 가 버린 그 침대 위에서 또 다른 목숨이 삶을 연명하기 위해 밥을 먹는다. 죽음과 밥과 삶….
살고 죽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연결인가를 깨닫고 나는 내가 통과한 약간의 호들갑을 부끄러워한다. 호들갑을 떨지 않고 살기는 그러나, 얼마나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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