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씨 『얼음의 집』|고문 기술자의 내면 세계 탐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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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이번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에 발표한 정찬의 장편 『얼음의 집』은 임철우의 『붉은 방』과는 정반대로 고문자의 입장에서 폭력과 인간의 내면 문제를 다룬 특이한 소설이다.
정찬은 이 소설을 통해 권력의 하수인으로 기능 하는 고문자가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고도의 정치한 논리를 만들어 보인다. 그리고 그 정치한 논리가 사소한 감정의 흔들림에 의해 어떻게 부서지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정찬의 『얼음의 집』은 일종의 「고문자의 사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논리의 안과 밖을 심도 있게 탐구한 작품이다.
정찬에 의하면 완벽한 고문자는 「얼음의 집」에 사는 인간이다. 그것은 완벽한 고문자는 한편으로는 권력의 도구로 기능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여받은 권력의 힘을 즐기려 해서는 안되는 까닭이다. 완벽한 고문자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통해 그 권력의 정상에 오르는 내면의 사다리를 완성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한치의 감정이 개입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고문자가 피고문자의 전락을 즐기려 하는 순간 그는 피고문자들의 증오와 원한의 퇴적물인 역사 속으로 함몰한다.
그 역사 속에 자신을 함몰시키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면서 스스로를 새로운 권력의 자리에 앉힐 수 있는 길-그것은 정찬에 의하면 쾌락을 지우고, 권력의 얼굴을 지우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문자 자신을 증오와 원한의 퇴적물인 역사로부터 비켜서게 하는 것이다.
정찬의 『얼음의 집』은 이같은 「고문자의 사상」을 하야시라는 고문 기술자의 입을 통해 개진시킨다. 그리고 그가 이같은 고문의 사상을 만들어 내게된 역사적·실존적 이유들을 하야시의 제자인 「나」라는 한국인이 하나 하나 밝혀나가는 것으로 소설을 전개시킨다. 다시 말해 『얼음의 집』은 주인공인 「나」가 떠올리는 하야시의 가르침과 주인공이 찾아낸 하야시의 삶 (「나」의 삶에 대한 회상도 포함해)이라는 두 측면으로 구성돼 있다. 그것들은 고문자의 사상의 안과 밖을 이루면서 이 작품의 관념성과 현실성을 만들어낸다.
필자가 보기에 정찬의 『얼음의 집』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은 권력과 사랑의 관계다. 햐야시가 평생동안 구축해 온 고문자의 사상 (얼음의 집)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바로 이 사랑이다. 소설 속에서 하야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의 생명이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희귀한 정신의 기적』이라고. 사랑은 고문자의 냉혹한 정신을 치명적으로 파괴한다. 사랑은 고문자가 지녀야할 기본적인 자세, 즉 살아 있는 인간을 단순한 사물로 간주하는 자세를 망가뜨린다. 인간을 단순한 대상으로서 기계적으로 다루어 가야할 고문자의 내면 세계에 감정의 흔들림을 가져오고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정찬의 『얼음의 집』은 그토록 집요하게 인간들의 섬뜩한 권력의지를 탐구함으로써 결국 사랑의 힘을 보여주려 한 게 아닐까. 홍정선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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