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가 보는 전후 세계질서/워싱턴포스트=본사특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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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랍국 세력균형이 우선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부시 대통령이 걸프전쟁후 미국의 주도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하겠다고 밝힌 것은 현실과 거리가 있는 다분히 이상적인 구도라고 지적하고 걸프전쟁후 아랍지역의 평화를 위해서는 이라크·이란·시리아와 그밖의 이 지역 국가간에 세력균형을 통해 지역안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키신저박사가 워싱턴 포스트지에 기고한 「새로운 국제질서의 잘못된 꿈」의 요약이다.<편집자주>
미국은 대규모전쟁에 참여할때 마다 명분이 있었다. 1차대전때는 지구상에서 전쟁이라는 단어를 종식시키겠다는 명분으로 2차대전때 역시 국제연합을 통해 항구적 평화질서를 유지하겠다는 포부로 전쟁에 참여했다.
이번 걸프전쟁 역시 부시가 밝혔듯이 유엔의 평화역할을 근간으로 각국이 국제법을 준수함으로써 냉전후 국제질서를 형성키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 과정에서 미국은 소련을 포함한 세계적인 결속과 지원을 얻어 전쟁을 마무리할 시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번 걸프전쟁의 경험으로 볼때 부시 대통령이 추구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세계주요국가가 미국의 주도아래 이렇게 결속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우연의 결과며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기란 힘들 것이다.
소련만 해도 국내문제로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성이 있었으며 중국도 동북아에서의 일본·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데 미국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천안문사태의 해결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프랑스는 독일통일에 자극받아 미국과 거리를 두기를 원치 않았다.
중동지역만 하더라도 시리아의 아시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과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처지에서,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문명과 나일강문명의 역사적인 갈등속에서 쉽게 반이라크전열에 가담할 수 있었다.
또 사담 후세인이 지나치게 악명이 높고,변명여지가 없는 침략이었던 점도 작용했다.
또 미국 자신도 이번과 같은 완전한 우위의 입장을 다시금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재정부담능력도 문제지만 세계는 양대세력으로 갈라섰던 냉전시대보다 더 복잡해져 갈 것이 분명하다.
미국은 개입해야할 분쟁과 미국의 이익과 무관한 분쟁을 구별하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또 우방국과도 책임분담을 재조정해야 한다. 더이상 미국이 돈을 받아 전쟁을 하는 용병식의 전쟁을 치를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은 미국이 세계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는 철학적인 문제에 있다.
국제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지배구조를 택할 것인가,아니면 이와 반대개념인 힘의 균형구조를 택할 것이냐의 문제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질서 지배를 위한 자원도 없으며 그 자체가 미국의 가치와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의 지적풍토로 볼때 도덕적 원칙도 없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일종의 사악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힘의 균형정책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즉 국제정치에서는 영원한 적도,영원한 친구도 없는 것이다.
걸프전쟁후 적이었다 하여 이라크를 소외시킬 것이 아니라 이를 포함한 이란·시리아,그밖의 관련국들간의 힘의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이 지역 안정을 이루어야 한다.
동북아역시 일본·중국·소련간의 힘의 균형으로 안정되어야 한다.
다만 미국은 이러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조정자 역할만 해나가면 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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