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 화끈한 울 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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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 길로 집을 나섰다. 어찌나 맘이 급하셨던지 외출 준비도 못하셨다. 시장표 보라색 슬리퍼에 집에서 일하다 만 차림으로 집 근처 자동차영업대리점에 들어섰다. 영업직원들은 다 늦은 시간에 웬 정신없는 아줌마가 뛰어들었나 싶은 표정이었다. 무시와 놀라움이 역력했다. 엄마는 아랑곳없이 "차를 사러 왔다"고 했다. 한 영업사원이 다가와 미리 봐둔 모델이 있는지, 가격대는 얼마나 생각하는지 물었다. 엄마는 "그런 것 없고 가진 돈이 400만원대인데 거기 맞는 차가 뭐 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행히 거기에 전시된 차 중 가장 작은 것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엄마는 "내일 당장 써야 하니 지금 가지고 갈 수 있는 걸로 달라"고 했다. 직원이 전시돼 있는 벽돌색 차를 가리키자 엄마는 두 말 없이 값을 치렀다. 그리고 영업사원이 모는 차를 타고 당당히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얼떨결에 생긴 차에 자못 놀라신 표정이었지만 무척 기뻐하셨다.

아버지께서 "돈이 어디서 나 갑자기 차를 샀느냐"고 묻자 엄마는 "꾼 돈 아니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 치셨다. 알고 보니 그 돈은 어려운 형편에도 엄마가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가며 모아놓은 비상금이었다. "안 쓰고 계속 모으려고 했는데 그깟 누가 쓰던 차 때문에 느이 아빠 기죽은 모습 볼 수 없어 그냥 산거야. 흥, 가지고 가려면 가라지! 이제 그런 꼴 안 봐도 된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는 가끔 그 때 일을 얘기하신다. 그때만큼은 시장표 슬리퍼에 초라한 옷차림에도 당당했던 젊은 날로 되돌아 가신 듯하다.

이민아(30.주부.수원시 영통동)

22일자 주제는 '크리스마스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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