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정략에 밀린 악법개폐(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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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회의 개혁의지와 자정의지를 기대한 국민들의 바람은 또 다시 무산됐다.
9일로 끝나는 제152회 임시국회는 회기 초반 국회의장을 포함한 여야대표의 천명에도 불구하고 악법개폐작업을 매듭짓지 않았다.
우리는 임시국회의 이같은 의정운영상을 지켜보면서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회의적 시각과 불만이 한계점에 도달할까봐 걱정부터 앞선다.
여야가 이번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안기부법의 개폐를 완결하지 못한 이유를 우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88년 5월 제13대 국회의 개원이래 국회가 열릴 때마다 여야는 5공청산과 민주개혁의 제도적 장치인 이들 개혁대상의 법을 개폐하겠다고 다짐해 왔다.
그후 협상과정에서 서로의 의중과 입장은 훤히 드러난 상태다.
더구나 여야는 지난 정기국회 막바지에 순전히 이들 법을 매듭짓기 위해 이번 회기소집을 합의했다. 여야는 개혁입법의 처리를 통해 5공 사슬에서 풀려나 앞으로는 내일의 국가경영 방향을 논의하는데 의정초점을 두자는 암묵적 합의를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여야가 3년이나 질질 끌면서 상호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난 중요 현안을 이번에도 타결하지 않은 속셈에 우리는 의혹의 눈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들 법의 개폐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달라진 시대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들 법의 적용을 불가피하게 받아야 하는 당사자들 및 친·인척의 고통과 한을 여야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면 협상자세는 달라졌을 것이다.
6공 이후 정치범이 5공보다 더 늘어났다는 일부 주장은 여야 모두에게 정치적 부담이 되고 있는 현실이자 우리 사회의 치부다.
이들 법을 고침으로써 우리의 남북분단 현실상 최소한의 불가피한 정치범만 감내할 길이 있음에도 여야가 당략적 측면에서만 오불관언의 고집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결코 정치인의 도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국가안보와 관리,그리고 민주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법개정 방향에 관한 여야의 상이점은 얼마든지 타협·조정될 수 있는 사안들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야가 절충에 실패한 근본원인은 여야 쌍방의 정략적·파당적인 계산에 연유한 것이다.
특히 지자제선거를 앞두고 여야는 서로 상대방에 유리한 결과로 비쳐질 법손질은 할 수 없다는 저의가 명백하다는 것이 정계의 일반적 시각이기 때문이다.
여야가 오직 상대방의 무성의에 책임을 전가하면서 입법권 행사의 직무를 이처럼 유기하는 듯한 작태를 언제까지 계속하여 희생자만 양산해도 되는지를 맹성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이제 좀 자신들의 행동과 저의를 꿰뚫어 보고 이에 냉소를 보내고 있는 국민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세를 가다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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