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부패의 도돌이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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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2년 피에트로로 대표되는 이탈리아의 젊은 검사들이 '깨끗한 손'을 뜻하는 '마니 폴리테'를 선언하며 성역 없는 엄정한 수사와 법 집행으로 고질적인 정치부패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당시 무려 3천여명의 유력 정치인과 기업인을 수사 대상에 올려 1천4백여명을 체포했고, 이 가운데 일곱차례나 총리를 지낸 안드레오티 같은 거물 정치인을 포함해 1천명 이상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었다.

*** 부패고리 발라내고 긁어내라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 이탈리아의 기업인 대부분은 '마니 폴리테'라는 부정부패 청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부패가 만연하고 있으며, 자신들 역시 정치인들에게 아직도 뇌물을 줄 준비가 돼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결국 변하지 않은 것이다. '부패의 도돌이표'를 그리고 만 셈이다.

부패는 용수철과 같다. 상황이 어려우면 움츠렸다가도 상황이 호전되면 여지없이 다시 튀어오른다. '부패'라는 놈만큼 세상 눈치에 빠른 것도 없다. 더구나 부패만큼 끈질긴 것도 없다. 그래서 부패는 '척결(剔抉)'이라는 보다 강도 높은 단어와 짝을 이루어 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척결'. 말 그대로 '뼈와 살을 발라내고 긁어낸다'는 뜻이다. 그렇게 발본해 가혹하게 하지 않으면 부패는 다시 도돌이표를 그리며 만연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번만큼은 정치부패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내자는 국민적 공감대가 버팀목이 되어 검찰의 칼이 부패한 정치자금의 뼈와 살을 발라내고 긁어내고 있다. 또 국민은 검찰이 그 일을 충직한 자세로 감당해 주리라 믿고 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도돌이표의 조짐'은 가시지 않고 있다. 검찰의 칼날 앞에 전전긍긍하던 정치권이 요즘 와서 다시 원위치하며 표정관리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부터가 그렇다. 대통령 입에서 몇 번이고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얼마 전인데 요즘 대통령의 얼굴을 보면 화색이 완연하다. 그 어느 구석에도 '재신임' 운운하며 "국무위원 볼 낯도, 국민 볼 낯도 없다"고 말했던 그 아찔할 정도의 비장함이 여간해선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아무리 격무에 시달리는 대통령이라지만 이런 위기의 고비에서 구설에 올랐던 인물과 함께 부부동반해 골프장에 서 있는 모습을 보자니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자신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했던 대선 과정에서의 부정한 선거자금 수사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 작금의 사태의 위중함을 좀더 깊이 의식하는 대통령이라면 결코 그렇게 처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재신임'이란 단어가 신문지상에서조차 실종돼 버렸지만 엄연히 우리는 아직도 재신임 정국에서 풀려나지 못했다. 지금 나라 전체가 대선자금 수사에 휘말려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도 그 원인을 따지고 거슬러 올라가 보면 최도술씨 문제 등 이미 드러난 대통령 측근 비리에 대한 수사와 SK 비자금 등 대선 불법자금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 후에 재신임 국민투표 실행 여부를 결론짓자는 암묵적인 정치적 합의가 여야 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대통령은 '재신임'까지 걸겠다고 말했던 만큼 지금 더욱 자숙하는 자세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더 보여야 함이 마땅하다.

*** '재신임'단어가 쑥 들어갔지만

야당대표도 마찬가지다. 특히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의 경우 SK 비자금 문제와 관련해 석고대죄하겠다고 했는데 그저 말로만 하고 그칠 참인지 묻고 싶다. 석고대죄를 하겠다던 사람이 말만 했지 행동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더구나 "왜 상대방 죄는 작게 묻고 자기 측 죄만 크게 부각하느냐?"며 '특검'을 강변하지만 그것도 국민의 눈으로 보면 별반 설득력이 약하다.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국회의 과반이 넘는 의석을 지닌 정당이면서도 지리멸렬한 것 아닌가 싶다.

국민은 '부패의 도돌이표'를 원치 않는다. 대통령과 책임있는 야당대표 이하 모든 정치인은 이 사태에 이르게 된 근원적 이유를 곱씹으며 더욱 자숙해야 한다. 석고대죄는 말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