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지명 첫날 탄핵 카드…방통위가 정쟁 제물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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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위원장 내정자에 야당  “탄핵 대상” 공세

MBC 대주주 방문진 이사 선임 앞서 여야 대립

잇따른 탄핵 추진·사퇴에 방송·통신 현안 표류

방송통신위원회를 둘러싼 여야 간 힘겨루기가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4일 새 방통위원장 후보로 이진숙 전 대전 MBC 사장을 지명했다. 김홍일 전 방통위원장 사퇴 이틀 만이다. 야당은 윤 대통령에게 이 내정자의 지명 철회를 요구하며 공세를 펼치고 나섰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 의원들은 이날 오후 긴급성명을 내고 “이 내정자를 임명한다면 탄핵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지명되자마자 탄핵 카드부터 꺼내든 것이다.

이 내정자도 첫 등장부터 야권과의 ‘강 대 강’ 격돌을 예고했다. 4일 지명 소감을 말하며 MBC를 겨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바이든 날리면’ 같은 보도는 최소한의 보도 준칙도 무시한 것이다. 음성이 100% 정확히 들리지 않으면 보도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라면서다. 또 “(공영방송은) 노동 권력과 노동 단체로부터도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

현 정부 들어 취임한 이동관·김홍일 등 두 명의 방통위원장은 모두 야당의 탄핵소추안 발의 후 자진 사퇴했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돼 업무가 정지되기 전 서둘러 자리를 내놓은 것이다. 이 전 위원장은 3개월, 김 전 위원장은 6개월 만에 물러났다. 법으로 보장된 임기(3년)가 무색한 단명이다.

공영방송, 특히 MBC에 대한 여야 간 주도권 싸움이 방통위 파행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방통위가 선임하는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는 여당 추천 6명, 야당 추천 3명으로 구성돼 있다. 문재인 정부 때 꾸린 현 이사진의 임기는 다음 달 12일 끝난다. 야 5당이 방통위원장 탄핵소추안을 발의한 것은 방통위 업무를 중단시켜 친야 인사가 다수인 현 이사진 구도를 오래 끌고 가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방통위는 탄핵안 발의 다음 날인 지난달 28일 방문진을 비롯한 공영방송 3사 이사진 선임 계획을 의결했다. 이사진 교체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상임위원 5인의 합의제 기관인 방통위는 지난해 8월부터 2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기형적인 상황 역시 여야 모두의 책임이 크다. 야권 추천 인사(최민희 현 국회 과방위원장)에 대한 임명을 대통령이 미루는 사이 후보자가 사퇴했고, 그 이후엔 야당에서 추천 자체를 하지 않았다.

방통위에는 지금 방송·통신 현안이 산적해 있다. 국내 OTT 산업 활성화 방안, ‘데이터 주권’ 보호책 마련 등이다. 인앱결제 강제 금지법 위반과 관련해 구글과 애플에 대한 과징금 부과 계획도 8개월째 최종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야권은 공영방송 장악에 골몰하는 모양새다. 이사회 구성을 야권에 유리하도록 바꾸는 ‘방송 3법’은 현재 본회의에 부의돼 있다. 야권은 21대 국회에서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폐기됐던 법안을 22대 국회가 시작되자마자 다시 발의해 속전속결로 법사위까지 통과시켰다.

이런 가운데 방통위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행보도 빈축을 사고 있다. 류희림 위원장의 ‘민원 사주’ 의혹이 계속되고 있는 데다, 방심위에서 구성한 22대 총선 선거방송심의위원회의 법정 제재 건수는 역대 최다인 30건을 기록했다. 선방위는 출연자가 ‘김건희 특검’에 ‘여사’를 붙이지 않았다며 행정지도인 ‘권고’를 의결해 과잉 조치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방통위의 본업은 방송·통신·플랫폼 등에 대한 정책과 규제를 총괄하는 것이다. 본업이 정쟁에 휘둘려 방치되면 산업 경쟁력은 무너지고 이용자 권익은 표류하게 된다. 더욱이 글로벌 기업의 공세는 점점 거세지고 있다. 정쟁은 정치의 장에서 하고, 방통위는 정상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