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과 곶에서 제철소로...서해안 따라 이어지는 '상전벽해' 답사[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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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명의 최전선
김시덕 지음
열린책들

도시문헌학과 도시답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온 지은이의 열 번째 답사기다. 이 답사기는 땅에 새겨진 한국 근대사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지도를 읽고 문헌을 살피며 현장을 발로 직접 찾는 삼박자가 서로 시너지를 이룬다.

이번 책의 지리적 범위는 대서울권 서해안 지역에서 충남 서해안 지역을 지나 금강에 이른다. 충남 서해안과 인천을 이어주던 옛 뱃길을 끊고, 굴 양식장과 염전을 메워 만든 충남 북부의 거대 간척지는 ‘뽕밭이 변해 바다가 됐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현장이다.

지은이는 지도와 지명을 세밀하게 파고들며 지리와 역사를 동시에 아우른다. 예로 ‘고잔(高棧)’은 곶안, 즉 곶의 안쪽에 형성된 마을을 가리킨다. 육지에서 바다로 튀어나온 ‘곶’이 아닌 곳에 이런 지명이 있다면 주변이 간척됐음을 의미한다. 지은이는 1915년 제작된 지도에서 충남 당진군 송산면 당산리 오도(鰲島‧자라섬)을 살피다 인근 고잔리를 발견하자 이런 설명을 보탰다. 오늘날 안산시 단원구나 인천 남동구 고잔동의 유래까지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당진 고잔리는 일찌감치 당산리에 흡수됐지만, 현재 멀지 않은 곳에 거대 제철소가 가동 중이다. 자라섬과 곶안이라는 정겨운 이름의 ‘상전’이 제철소라는 ‘벽해’가 됐음을 알 수 있다.

지은이는 공업단지가 들어선 서산 간척지에서 ‘명천포구’라는 버스정류장을 발견한다. 서산‧태안에서 인천을 오가던 정기여객선이 운항되던 명천항의 흔적이다. 인근 서산시 대산읍 삼길포에선 충남과 인천을 이어주던 마지막 뱃길인 충남삼길선이 1994년까지 다녔다. 지은이가 『관광교통 시각표』 1987년호에서 찾아낸 인천항 뱃길 안내도가 당시를 증언한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말하는 사진’. 당진포항 소금창고나 1984년 대호방조제 완성으로 육지로 바뀐 서산 명천항에 남아있는 배턱새우젓집 사진은 그야말로 지리가 역사와 만나는 순간이다. 이런 진귀한 사진만 보면 이 답사기를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마지막 관찰을 통해 과거를 반추하며 농업적 구조의 해체상을 보여주는 기록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도시답사와 도시문헌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예로 뱃길의 역사를 통해 인천에 충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연유까지 알려준다. 사회적‧정치적으로 중요한 인구 이동과 변천의 과정을 전해주는 일차 사료다. 땅과 사람의 변화에 대한 관찰은 근대화와 도시화를 고찰하고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깨닫게 해주는 죽비소리일 것이다.

우리는 천 년에 걸친 간척으로 이뤄진 강화도 해안에서 역사를 마주하고, 백 년 간척의 결과로 탄생한 인천 청라지구에 신도시를 건설하며, 영종도‧용유도‧삼목도‧신불도가 간척으로 이어진 인천공항에서 출입국을 한다. 이처럼 땅의 역사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2018년 『서울 선언』을 시작으로 2019년 『갈등 도시』, 2021년 『대서울의 길』 등으로 이어져온 도시답사 대장정은 앞으로 ‘한국도시 아카이브’ 시리즈로 묶여 나온다. 대서울권을 벗어나 전국을 다루는 장기 프로젝트로 새롭게 시작했다. 부제 ‘한강에서 금강까지 대서울 너머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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