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22대 국회, ‘실패의 한국 정치’ 바꾸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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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

인터넷이 등장한 지 30년, 스마트폰이 나온 지 15년, 인공지능(AI)을 대중화하고 있는 챗GPT가 등장한 지는 2년이 채 안 된다. 지금 진행되는 디지털 혁명이 지난 30년 세상과 인간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 오고 있는지 돌아보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얼마나 유별나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AI의 발전은 인간사회가 수천 년에 걸쳐 발전시켜온 의사결정 방식, 지배와 통치의 구조도 바꾸어나갈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신화를 창조하고 픽션을 만들어내어 공통의 믿음에 바탕을 둔 공동체를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를 통해서라고 했다. 공감 가는 말이다. AI가 인간사회의 언어와 소통을 점점 장악하게 되며 이제 역사의 흐름을 인간이 아닌 AI가 주도하게 될지 모른다.

반면 지난 30년간 변화 없는 것은 한국 정치와 국회다. 1992년 개원한 14대 국회와 한 달 여 전 마감한 21대 국회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뚜렷한 인상이 남아있지 않다. 그동안 정당들의 이름이 무상하게 바뀌었고 이합집산이 잦았으며, 진보성향 정당의 의석이 크게 약진한 것이 다르다면 다른 모습들이다. 여야 간 갈등, 투쟁 방식, 소모적 정쟁, 책임지지 않는 의회정치의 모습은 그대로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면 디지털 혁명, AI 혁명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틀을 다시 흔들고 재구성해 나가게 될 것이다. 이미 SNS는 민주주의의 토양을 바꾸며, 팬덤 정치 및 포퓰리스트 정치로 나아가게 해 국가 선출직들을 ‘지도자’가 아니라 ‘추종자’들로 전락시키고 있다. 연금·의료·고용 등 복지정책과 사회적 균형을 위한 재정지출 확대는 고령화와 더불어 더욱 늘어나게 되어 ‘사회국가’의 성격은 디지털 사회에서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결국 재정지원에 대한 국민의 중독성을 높이고, 수혜집단을 늘여 선거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증대하며, 향후 ‘사회국가’는 점점 더 경로 의존적이 되어갈 것이 분명하다. 기술의 발전, 소통방식의 변화, 의사결정의 토양이 바뀌면서 정치도, 사회도, 시장도 변화해 나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이며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로의 진화를 이뤄가기 위해선 시대의 변화에 따른 좋은 제도의 틀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기술, 시장, 사회의 발전 방향도 제도의 틀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국가지배구조, 지도자의 역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가의 번영과 쇠락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압도적 야대여소의 22대 국회가 개원한 지 한 달이 넘었다. 협치가 어려운 지금의 한국 정치제도 하에서는 대통령이 야당과 각을 세우며 거의 식물화되든지, 공통분모를 찾아 타협과 협력의 정치를 모색해 원하는 정책의 일부라도 현실화하든지 둘 중 하나밖에 없다. 후자가 분명 나은 선택이나, 상대를 실패하게 해야 내가 집권하게 되는 오늘의 정치풍토에서 이를 기대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 한국의 정치는 실패의 정치다. 공동의 성공 가능성이 열려있어도 그것이 상대방의 실패보다 이득이 작으면 실패를 택한다. 여야 모두 이런 정치를 해왔다. 정권을 놓치면 압수수색 당하고, 감옥에 가는 세상에서는 그것이 합리적 선택인 셈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상대 후보, 상대 당을 끌어내리는 강경투쟁에 몰두하고, 그런 것을 잘하는 투사들이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그렇게 사활을 건 정권투쟁을 해놓고 막상 집권하면 국가과제를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한 채 임기를 끝내는 것이 지금의 한국 정치다. 무엇을 위한 집권인가? 주요 벼슬자리들을 차지하려 사투를 벌이던 조선 시대 당쟁과 뭐가 다른가? 이 고리를 끊지 않고는 한국 정치는 국가번영보다 국가실패를 가져오는 정치가 될 것이다.

지금의 정치제도, 정치풍토, 권력구조를 바꿔야 한다. 상대를 벼랑에 몰고, 감옥에 보내는 것이 손해가 되는 정치풍토가 되어야 한다. 상대가 언제 연립정부 대상이 될지 알 수 없고, 여소야대가 없는 다당제 내각제가 그런 면에서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보아온 바와 같이 정권 지지율이 쉽게 20~30%대로 내려앉는 한국 정치 환경에서 내각제는 만성적 정권 불안정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문제, 국가경영시스템, 권력구조, 정권 임기를 놓고 이제 우리 국민이 공론장을 통해 진지한 토의를 이어가길 희망한다. 제헌헌법, 지금의 87년 헌법, 모두 졸속으로 해외 제도의 맹목적 모방, 당시 정치인들의 편의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우리 국민의 교육·지식 수준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이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지혜를 모아, 타협할 건 타협하며 우리의 현실에 맞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준비해 나갔으면 좋겠다. 22대 국회는 이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기를 희망한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