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스타트업 생태계 완성의 마지막 단추는 대기업 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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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연중기획 혁신창업의 길’의 올해 주제는 ‘스타트업 생태계 속 대기업의 역할’입니다. 오는 9월 서울대에서 열릴 ‘2024 혁신창업 대한민국 국제심포지엄’도 국내 및 글로벌 기업의 스타트업 투자와 오픈 이노베이션을 주제로 다룰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매달 열리는 ‘혁신창업국가 대한민국(SNK) 포럼’ 역시 스타트업 및 기업형 벤처캐피털(CVC)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혁신창업의 길’ 이번 차례는 그간 SNK포럼에서 논의됐던 스타트업 생태계와 CVC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편집자 주〉

 ‘○○스타트업 인수에 10억 달러’.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나 들을 수 있는 뉴스다.  국내 스타트업계 현실은 ‘소박’하다. 10억 달러가 아니라 1억 달러 투자 뉴스도 들을까 말까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소비자가전전시회(CES)에 참여했다가 국내 대기업에 기술 탈취를 당했다’는 소리까지 한때 들려왔다.

대기업 1조 투자 벤처기업 생길까

 ‘휴보 아빠’ 오준호 KAIST 명예교수가 자신이 창업한 로봇기업 레인보우로보틱스에서 제작한 다양한 로봇들과 함께 섰다. 김성태 프리랜서

‘휴보 아빠’ 오준호 KAIST 명예교수가 자신이 창업한 로봇기업 레인보우로보틱스에서 제작한 다양한 로봇들과 함께 섰다. 김성태 프리랜서

 하지만, 희망을 가져본다. 머잖아 국내 대기업이 국내 딥테크(deep-tech) 벤처기업에 1조원 이상 투자하는 사례가 생길지 모른다. 어디냐고? ‘휴보 아빠’ 오준호 KAIST 교수가 창업한 로봇기업 레인보우로보틱스다. 2011년 설립된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창업 10년만인 2021년 2월 코스닥에 상장됐다. 지난해 초에는 삼성전자가 유상증자 참여와 대주주 지분 매입 방식으로 총 870억원을 투자해 지분 14.83%를 확보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2029년 3월까지 오준호 교수 등 특정 대주주의 지분 상당 부분을 사들일 수 있는 콜옵션 계약까지 했다. 삼성전자의 지분율을 59.94%까지 끌어올리는 구상이다. 증권가에서는 이 경우 삼성전자의 총투자비용이 1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내 대학의 교수가 연구·개발(R&D)한 혁신기술이 창업으로 이어지고, 기업이 성장한 뒤 대기업에 인수돼 새로운 성장동력 역할을 하는 모범사례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1월 2023 소비자가전전시회(CES 2023) 행사장에서 취재진의 관련 질문에 “신성장 동력 중 하나가 로봇 사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공위성 제조기업 쎄트렉아이도 유사한 사례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1992년)를 만든 KAIST 인공위성연구소가 그 모태다. 1999년 인공위성연구소 연구원 출신들이 창업한 쎄트렉아이는 2008년 코스닥에 상장되고, 2021년 1월 한화그룹 계열사로 변신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1089억원을 투자해 지분 약 30%를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쎄트렉아이는 자체 기술로 소형 인공위성을 개발하는 국내 첫 기업으로, 아랍에미리트(UAE)와 말레이시아 등 외국에 인공위성 완성체를 수출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회사이기도 하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쎄트렉아이 인수뿐만 아니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우주발사체 기술도 이전받는 방식으로 한국판 ‘스페이스X’로 도약을 꿈꾸고 있다.

스타트업 투자로 신성장 동력 확보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는 스타트업 생태계 완성을 위한 마지막 단추다. 특히 연구개발에 큰 비용과 오랜 시간이 드는 딥테크 스타트업계로선 더욱 그렇다. 스타트업이 대규모 자본 유치를 통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고, 초기 투자자들은 대기업의 투자 참여를 통해 자본을 회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대기업으로서도 딥테크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개방형 혁신, 즉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다.

 국내 스타트업을 보는 대기업들의 시각이 바뀌고 있는 걸까. 그간 미국 등 외국을 돌면서 신성장 동력을 위한 스타트업 투자에 몰두해오던 대기업들이 국내 스타트업, 벤처기업들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계열사 CVC(기업형 벤처캐피털·Corporate Venture Capital)를 통해 투자하거나, 레인보우로보틱스·쎄트렉아이에서 보듯이 주력기업이 직접 투자해 경영권 인수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스타트업 투자 역차별 해소

 계기가 있다. 2021년 12월 일반지주회사 체제 내 CVC 설립을 허용하는 개정 공정거래법이 시행되면서 대기업의 국내 스타트업 투자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지주회사 체제의 스타트업 투자 규제를 풀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더욱 어려워진 벤처 생태계에 활력을 높인다는 명분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분리하는 규제 때문에 일반지주회사 체제에서는 금융회사의 일종인 CVC를 설립할 수 없었다. 2022년 7월 GS그룹이 1300억원 규모의 펀드를 가진 GS벤처스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대기업 CVC 설립이 이어졌다. 지난해 8월에는 포스코그룹의 CVC인 포스코기술투자를 의장사로 해 대기업 14개사와 중견기업 계열 16개사, 중소기업 계열 12개사가 참여하는 ‘CVC 얼라이언스’가 출범했다.

CVC는 금융기관이 아닌 기업이 출자한 벤처캐피탈이다. VC가 재무적 수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CVC는 기업의 기술혁신과 새로운 시장 진출 등 전략적 목표가 우선이다. 특히 개정된 공정거래법의 규제를 받는 일반지주회사 체제 아래에 있는 기업의 CVC는 펀드의 내부 출자 비중이 60% 이상 되어야 하고, 해외투자 비율이 전체 투자 금액의 20%를 초과할 수 없다. 전략적 투자에 집중하고,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더 많이 기여하라는 취지다. 스타트업들은 VC보다 CVC, 특히 대기업 CVC의 투자를 선호한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투자했다는 것만으로도 회사의 신용도가 올라갈 뿐 아니라, CVC 투자는 특성상 사업에 목적을 둔 전략적 투자이기 때문에 투자 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데다 대기업의 노하우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포스코와 KT의 CVC

 포스코기술투자의 경우 기존에는 일반 신기술사업금융회사로 활동해왔으나, 그룹의 지주사 체제 출범(2022년 3월)을 계기로 지난해 10월 CVC로 변신했다. CVC 1호 펀드로 KAIST와 포스텍 출신 딥테크 스타트업을 포함해 총 12개 우수벤처기업에 450억원을 투자했다. 강형구 한양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대기업그룹들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도입된 지주회사 제도가 스타트업 투자에는 역차별로 작용해 규제 개선이 필요했다”며 “아직 더 풀어야 할 규제가 많지만, 개정 공정거래법 시행으로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에 힘이 실린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주사 체제가 아닌 기존 대기업 그룹 CVC들의 딥테크 스타트업 투자도 긍정적이다. KT그룹의 CVC인 KT인베스트먼트는  최근 스타트업 투자에 성과를 내는 대표적 비지주회사 체제 CVC 중 한 곳이다. 인공지능과 로보틱스·모바일 등 정보기술(IT) 분야를 중심으로 86개 스타트업에 1878억원을 투자해왔고, 이 중 솔트룩스와 루닛 등 7개사를 코스닥에 올리는 성과를 올렸다. 또 메가존클라우드와 팀프레시의 경우, KT본사에서 1000억원 안팎의 추가 투자가 이뤄지기도 했다. 김진수 KT인베스트먼트 본부장은 “운용자산이 2019년 1490억원이었으나 지난해에는 3155억원으로 성장했다”며 “금리 인상 등으로 투자시장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R&D 기반 국내 딥테크 스타트업들은 더 활발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CVC 투자 으뜸은 미국

 CVC 투자에 가장 앞선 나라는 미국이다. 세계 최초의 CVC도, 글로벌 CVC ‘톱3’도 모두 미국업체일 정도로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대기업의 역할이 확고하다. 세계 최초의 CVC는 듀폰으로, 1914년 당시 창업 6년 차 자동차 스타트업인 GM에 투자했다. 세계 CVC의 선두주자는 구글 지주회사인 알파벳의 구글벤처스(GV)다. 2009년 설립 이후 최근 10년간 연평균 44개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고, 약 80억 달러(약 11조 500억원) 이상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다. 2위는 인텔 계열의 인텔캐피털. 1991년 설립된 이후 1500개 이상의 기업에 투자해왔다. 초기 스타트업 투자사인 펜벤처스의 송명수 대표는 “구글과 인텔 등 글로벌 CVC들의 적극적인 딥테크 스타트업 투자는 첨단 기술 혁신과 스타트업 생태계 구축에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경환 성균관대 창업대학원장은 “대규모 장기투자가 필요한 딥테크 스타트업 분야는 기존의 VC 투자로는 역부족”이라며 “대규모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게 대기업과 CVC”라고 말했다. 그는 “지주회사의 투자 규제를 해소했다고 하지만 개별펀드의 외부출자를 40% 이내로, 해외투자는 20% 이하로 제한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규제”라며 “글로벌 수준에 맞는 규제 해소가 절실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