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가 이렇게 웃기다니"…인도 문명사 다룬 PD가 쓴 이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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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컴퓨터 그래픽을 접목한 EBS 다큐 '한반도의 공룡'을 선보여 화제가 됐던 한상호PD가 이번엔 생성형AI와 다큐를 결합했다. 사진 EBS

2008년 컴퓨터 그래픽을 접목한 EBS 다큐 '한반도의 공룡'을 선보여 화제가 됐던 한상호PD가 이번엔 생성형AI와 다큐를 결합했다. 사진 EBS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웃겨도 되나요?”, “조금 이상하지만 좋네요.”
지난달 24일부터 지난 1일까지 3부작으로 방영한 EBS 다큐프라임 창사특집 ‘위대한 인도’를 본 시청자 반응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도 문명사를 촘촘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시청 소감 치고는 좀 별나다.

그도 그럴 것이, ‘위대한 인도’는 자료 화면을 놓고 해설자, 성우가 번갈아 설명하는 보편적이 다큐 문법을 따라가지 않는다. 걸그룹 에스파의 ‘슈퍼노바’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해 사람이 건물 꼭대기에서 날아가는가 하면, 출연자인 서울대 강성용 교수(아시아연구소 남아시아센터장)와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전기·전자공학부)가 타지마할 앞에서 춤을 추며 노래한다. 간디, 찬드라 굽타 등 교과서 속 인물들이 공연장에 앉아 교수들의 설명에 한 마디씩 거들기도 한다.

인도 델리 건물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무굴제국 초대 황제 바부르. 걸그룹 에스파의 '슈퍼노바' 뮤직비디오 장면을 패러디했다. 사진 EBS

인도 델리 건물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무굴제국 초대 황제 바부르. 걸그룹 에스파의 '슈퍼노바' 뮤직비디오 장면을 패러디했다. 사진 EBS

공연장에 앉은 인도의 위인들. 사진 EBS

공연장에 앉은 인도의 위인들. 사진 EBS

다소 황당한 이 장면들은 모두 생성형 AI(인공지능) 기술로 만들어졌다. 지난 2일 서울 잠실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연출자 한상호(54) PD는 “생성형 AI를 사용한 첫 다큐라서 주목받고 있지만, 앞으론 AI를 사용하지 않은 다큐가 주목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5년 EBS에 입사한 한 PD는 기술과 스토리의 결합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 2002년 시각 기술을 사용한 다큐 ‘문자’로 삼성언론상을 받았고, 2004년 초고속 촬영 기술로 다큐 ‘마이크로의 세계’를 연출해 한국방송프로듀서상, 과학문화상을 수상했다. 2008년엔 정교한 풀CG(컴퓨터 그래픽)로 만든 공룡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EBS 다큐 ‘한반도의 공룡’을 연출하고, 영화 ‘점박이 3D’(2012), ‘점박이2’(2018)까지 선보였다.

‘위대한 인도’에서 생성형 AI라는 첨단 기술을 다큐에 접목한 한 PD는 “IT로 유명한 인도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AI를 꺼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직접 사용해보니 여러 면에서 파괴적인 기술이다. 촬영 후 CG를 따로 입힐 필요가 없으니 제작비도 절감되고 제작 기간도 줄어들었다”고 긍정적 효과를 전했다. 이어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에겐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지만, 잘 사용한다면 무한한 기회를 가져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큐는 추후 영어와 힌두어로 번역돼 인도 최대 공영방송사인 프라사르 바라티에서도 방영된다. 해설집 역할을 하는 동명의 책도 발간했다.

한상호PD는 "'위대한 인도'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다큐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EBS

한상호PD는 "'위대한 인도'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다큐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EBS

‘위대한 인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원래부터 세상에 없었던 다큐를 제작하고 싶었다. 연출자로서 새로운 영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난해 2월 기획 때부터 춤, 노래, 연극, 영화 등 모든 요소를 녹여보자고 다짐했다. 실제로 촬영했다면 돈이 많이 들어갔을 텐데 AI로 효율적으로 만들어볼 수 있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인도를 3부작에 담기엔 벅찼을 텐데.
“편집량이 많았다. 강성용 교수와 김대식 교수에게 고대, 중세, 현대 인도로 나눠 사흘 간 이야기를 부탁드렸다. 두 분이 엄청난 '헤비 토커'여서 8시간씩 녹화하고도,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에도 얘기를 이어가더라. 이를 토대로 뼈대를 만들었고, 인도에서 추가 촬영을 해서 살을 보탰다.”

다큐는 강 교수와 김 교수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된다. 한 PD는 영화 ‘트립 투 이탈리아’에서 영감을 받아, 두 교수의 농담 섞인 대화로 인도를 풀어냈다. 설명이 길어지거나, 보충 자료가 필요할 땐 생성형 AI로 만든 인도 위인들이 나와 재미를 더한다. 위인들은 종이 인형 또는 현실감 있는 그림 형태로 등장한다. 인도 촬영 장면은 두 교수의 여행 브이로그 느낌으로 예능적 매력을 살렸다. 발리우드 영화처럼 이야기 단락마다 춤과 노래 장면이 삽입된다.

다큐 '위대한 인도'엔 인도학자 강성용 교수와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인도 브이로그도 등장한다. 사진 EBS

다큐 '위대한 인도'엔 인도학자 강성용 교수와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인도 브이로그도 등장한다. 사진 EBS

인도의 발리우드 콘셉에서 따와, 단락 별 설명이 끝나면 두 교수가 춤을 추고 노래한다. 안무와 작곡은 전문가 도움을 받았고, 작사는 PD가 맡았다. 나머지는 생성형AI를 활용했다. 사진 EBS

인도의 발리우드 콘셉에서 따와, 단락 별 설명이 끝나면 두 교수가 춤을 추고 노래한다. 안무와 작곡은 전문가 도움을 받았고, 작사는 PD가 맡았다. 나머지는 생성형AI를 활용했다. 사진 EBS

교수들 반응은 어땠나.
“굉장히 즐거워하셨다. 춤과 노래에 자신이 없다고 하셨는데, AI가 다 해줬다. 워낙 AI에 익숙하신 분들이다.”
영국 런던대에서 공부했던 경험이 다큐 제작에 도움이 됐나.
“인도에 대한 관심은 옛날부터 컸다. 버킷리스트에 두고 국내에서 발간된 책을 모두 읽었다. 2005년 영국에서 공부하며 독창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우리는 남들과 다르면 불안함을 느끼는데, 영국은 남들과 같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생성형 AI로 만든 장면. 사진 EBS

생성형 AI로 만든 장면. 사진 EBS

AI로 공룡 이야기를 다시 꺼내 볼 생각은 없나.
“그럴 생각은 없다. 이미 엄청난 CG 기술로 공룡을 힘들게 만들었다. 지금은 AI가 뭐든지 알아서 그려주는 시대다. 최대한 완벽하게 공룡을 만들기 위해 10년을 몰두했는데, 그런 시기가 무의미해진 것 같아 좀 착잡하다. 패러다임이 바뀌어가는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다큐 제작 환경은 어떻게 변할까.
“AI 발달로 PD라는 직업이 위협받고 있음을 실감한다. 항상 미래 기술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다큐의 내용적 측면에선 답이 정해져 있다. 다큐도 웃겨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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