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130만뷰 터졌네…'엄마'라서 하차한 개그우먼, 그 '엄마'로 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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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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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우먼 정경미(43)는 MBC 라디오 ‘박준형·정경미의 2시 만세’를 진행하는 동안 두 아이를 낳았다. 2014년 첫째 출산 때는 진통이 오기 전날까지 방송을 했고, 딱 23일을 쉬고 복귀했다. 그 짧은 휴가 기간에도 ‘대타’들의 방송을 들으며 혹 자리를 빼앗길까 봐 마음을 졸였다고 했다. 2020년 둘째를 낳고서도 한 달밖에 안 쉬었다. 그만큼 일에 애착이 컸던 그였다.

하지만 8년 넘게 진행해온 프로그램을 2022년 스스로 내려놨다. “매일 오후 생방송을 하느라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도록 내 손으로 하원 시킨 적이 없었다”는 걸 자각했을 즈음이었다. “우선 엄마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밝히며 자진 하차했다. 출산·육아에 따른 경력 단절. 그 흔한 코스에서 그도 벗어나지 못했다.

주부 캐릭터로 인기몰이 정경미
경력단절 거쳐 "내 무대 내가"
숏폼 동영상 평균 조회수 130만
'투맘쇼'는 전국서 500여회 공연

출산휴가 23일에도 못 피한 경력단절

그랬던 그가 최근 ‘엄마’ 캐릭터로 새로운 전성기를 열고 있다. 그가 방문판매 주부 사원 역할로 등장하는 유튜브 채널 ‘판매왕 정경미’와 인스타그램 동영상 릴스 ‘엄마 시리즈’ 등을 통해서다. ‘엄마가 옷이 많은 이유’ ‘엄마들이 몰려다니는 이유’ ‘엄마 핸드폰에 엄마 사진이 없는 이유’ 등 엄마들의 특징을 콕 집어내 웃음을 끌어내는 ‘엄마 시리즈’는 평균 조회 수가 130만회가 넘을 만큼 인기다. 그의 발목을 잡은 것 같았던 ‘엄마’가 그의 개그우먼 커리어에 강점으로 더해진 셈이다.

 정경미가 주부 방문판매원으로 등장하는 웹 예능 ‘판매왕 정경미’. [사진 디씨엘이엔티]

정경미가 주부 방문판매원으로 등장하는 웹 예능 ‘판매왕 정경미’. [사진 디씨엘이엔티]

정경미가 주부 방문판매원으로 등장하는 웹 예능 ‘판매왕 정경미’. [사진 디씨엘이엔티]

정경미가 주부 방문판매원으로 등장하는 웹 예능 ‘판매왕 정경미’. [사진 디씨엘이엔티]

지난 1일 경기도 분당 네이버 제2사옥 ‘1784’에서 그를 만났다. 네이버 쇼핑 라이브 ‘방문판매 정경미’ 방송을 막 마치고 나온 참이었다. 그는 “네이버에 먼저 제안서를 보내 따낸 일”이라고 했다. 워킹맘의 일·가정 양립이 여전히 어려운 우리 사회 현실 속에서 그의 고군분투 역사는 길었다.

그가 ‘엄마’에 주목한 건 2016년부터다.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불러주는 무대가 없었다. 우리가 직접 만들어보자, 후배 개그우먼 김경아·조승희와 의기투합했다.

그는 “개그의 시작은 관찰”이라고 했다. 관찰로 찾아낸 공감 포인트가 개그의 가장 큰 소재가 된다는 것이다. 엄마인 그는 엄마로 웃기기에 유리한 위치였다. 그 스스로와 주변을 관찰하며 소재를 찾았고, 육아 에피소드 중심의 개그 공연 콘텐트 ‘투맘쇼’를 2016년 론칭했다.

“남편(개그맨 윤형빈)이 운영하는 홍대 앞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했어요. 티켓값이 2만원 안쪽이었는데도 관객 모으기가 힘들더라고요. 공공기관을 공략하기로 하고 지자체 홈페이지를 다 뒤졌죠. 가족·육아와 관련된 부서 주무관님들한테 일일이 연락해 ‘이런 공연이 있는데 제안서 한번 보내드려도 될까요?’ 하면서 자리를 잡았어요.”

2019년 개그우먼 김미려까지 합류한 ‘투맘쇼’는 지금까지 전국 각지를 돌며 500회 넘게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엄마'서 웃음 포인트 발굴, 개그 소재로

2022년 라디오 방송 하차 이후 그는 '엄마'를 소재로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전을 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라이브 커머스 ‘방문판매 정경미’를 기획했다. 그해 9월 주 1회로 시작한 ‘방문판매 정경미’는 이제 월 13회로 횟수가 늘었다. 그리고 올 1월 쇼핑 라이브 속 방문판매 주부 사원 콘셉트를 웹 예능 ‘판매왕 정경미’로 확장했고, 그 캐릭터 그대로 숏폼 동영상 ‘엄마 시리즈’까지 제작하고 있다.

숏폼 동영상 ‘엄마 시리즈’. [사진 디씨엘이엔티]

숏폼 동영상 ‘엄마 시리즈’. [사진 디씨엘이엔티]

지난해 합계출산율 0.72명, 명실공히 출산 기피 시대다. 지난달 대통령은 ‘인구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했다. 워킹맘이 겪는 고충은 이 사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정부가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 따라 2006년부터 투입한 예산이 300조원이 넘는다는데, 경력 단절을 거쳐본 그는 할 말이 많았다.

“다양한 직업군에 맞게 지원 정책이 디테일하게 이뤄졌음 좋겠어요. ‘빨간 날’ 출근하는 직업도 많은데….”

세상의 변화는 더디다. 하지만 ‘롱런'을 계획하는 그의 일하는 방식은 바뀌었다. 라디오 진행자 시절 그는 휴가를 3박4일씩만 썼다. 그 기간의 방송은 녹음을 해두고 갔다.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주는 게 싫어서였다. 지난달 그는 제주도로 보름간 휴가를 다녀왔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됐다 싶더라"는 행복을 누리면서 동시에 “내 주변에 있는 것들로 내가 잘하는 것을 만들어 내 무대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