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상현의 과학 산책

물과 햇빛과 기다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모든 것이 머리 속에서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나는 왕처럼 행복해요.”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버트란드 러셀(1872~1970)의 편지이다. 논문을 쓰면서 떠오르던 영감과 그로 인한 희열의 이야기이다. 그는 철학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수퍼스타였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는 그를 위한 석좌교수직을 따로 만들었다.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이러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까다로운 제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장 만을 가진 스무살 남짓의 청년이었다. 초면부터 논리학 논쟁을 걸어왔고, 이를 반박하지 못해 제자로 받아들였다. 논문을 공개했을 때 제자는 오류를 공격했다. 러셀은 상심했다. “나는 그의 반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뼛속으로부터 그가 옳다고 느낍니다.”

그럼에도 스승은 제자를 사랑했다. 제자와의 토론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열정이라는 손에 차가운 검”을 쥔 진정한 철학자로 제자를 평가했다.

이후 제자는 철학적 방황을 시작하며 학교를 떠난다. 전쟁 포로 생활 중 역작 “논리 철학 논고”를 완성하기도 한다. 십수 년 만에 대학으로 돌아왔을 때, 스승은 여전히 제자를 인정했다. 박사 학위 심사가 있던 날, 위원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심사하다니, 얼토당토않네요.” 제자는 여전했다.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고 만장일치로 학위 수여를 결정하자, 제자는 심사위원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해 못 하실 줄 알았어요.”

제자의 위대한 재능을 맞닥뜨렸던 스승의 반응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 베토벤의 음악을 반박하지 못하던 스승 하이든, 청년 라마누잔의 천재성에 경외감을 느끼던 수학자 하디. 모두 제자의 재능을 꿰뚫어 보았고, 사랑했고, 오래 기다려주었다. 재능은 씨앗과 비슷하다. 싹은 그 속에서부터 스스로 틔워야 하지만, 그 성장에는 맑은 물과 따뜻한 햇빛과 느릿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