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정치 갈아엎을 ‘백마 탄 초인’이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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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드라마 ‘돌풍’에서 배우 설경구는 부패한 정치 권력을 청산하기 위해 스스로 악이 되어버린 국무총리 박동호 역을 맡아 대통령을 시해한다. 배우 김희애는 그를 막아서고 더 큰 권력을 차지하려는 경제부총리 정수진 캐릭터를 연기했다. [사진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에서 배우 설경구는 부패한 정치 권력을 청산하기 위해 스스로 악이 되어버린 국무총리 박동호 역을 맡아 대통령을 시해한다. 배우 김희애는 그를 막아서고 더 큰 권력을 차지하려는 경제부총리 정수진 캐릭터를 연기했다. [사진 넷플릭스]

“난 한 번도 국민을 위해 정치한 적 없다. 추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는 나를 위해서였다.” 대통령 장일준(김홍파)이 초심을 잃고 부패 기업인과 결탁하자, ‘오른팔’인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는 시해를 결심한다. 사임하라는 진언에 대통령이 오히려 그에게 누명을 씌웠기 때문이다. 박동호는 마약 성분 담배 용액을 바꿔치기하는 수법으로 시해를 실행에 옮긴다.

지난달 28일 전편(12부)이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은 이런 충격적인 사건으로 문을 연다. 대통령 시해, 정경유착, 정치적 협잡 등 역대 국내 정치 드라마 중 수위가 가장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통령이 중태에 빠지자, 박동호는 ‘4주 안에 대한민국을 싹 다 뒤엎겠다’며 불의를 처단하려 하고,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은 그를 막아선다. 정수진은 대통령의 권력과 대진그룹 부회장 강상운(김영민)의 재력을 등에 업고 더 큰 권력을 손에 쥐려는 인물이다.

설경구

설경구

극본을 쓴 박경수 작가는 “답답하고 숨 막히는 현실을 리셋하고 싶은 갈망에서 시작했다”며 “위험한 신념의 박동호와 타락한 신념의 정수진이 정면충돌해 대한민국 정치판을 무대로 펼치는 활극”이라고 말했다. 박 작가는 ‘추적자 더 체이서’ ‘황금의 제국’ ‘펀치’(이상 SBS) 등 정치 드라마를 썼다. 영화 ‘방법’(2020)의 김용완 감독이 연출했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들이 있지만, 박 작가는 “그리고자 했던 건 오직 인간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안전한 삶을 포기하고 불온한 꿈을 꾸다가 끝내 몰락하는 자들에 관심이 많다”며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세상을 청소하려는 박동호를 통해 현시대의 사람들에게 작은 메시지를 던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동호는 ‘답답한 현실에서 백마 탄 초인 한 명쯤은 기다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박 작가 기대감의 소산이다. 특수부 검사 출신인 박동호는 정계 입문 후 썩어가는 세상을 두고 볼 수 없어 대통령을 시해하고 비리로 얽힌 정적 정수진과 부패 기업인 강상운을 잡기 위해 목숨까지 건다.

설경구는 박동호를 ‘판타지적 인물’로 보고 연기했다. 3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그는 “박동호는 시작부터 (대통령 시해라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다. 쉽게 연기해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마음이 갔고 애정이 생겼다. 연기하면서도 그의 행동들을 악행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만화 같다’고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결말에서 박동호는 정수진을 살인범으로 몰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예상 밖의 전개 등에도 박동호가 가려는 방향이 옳게 느껴지는 건, 설경구 연기의 설득력 덕분이다. 그는 “‘당신(대통령)의 미래가 역사가 되면 안 된다’고 말한 박동호의 출발점에 몰입했다”며 “멘토로 생각한 사람이 변하고, 그 주변과 뿌리까지 썩은 게 보였다면 도려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말에 대해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작가님이 참 독하게 썼구나 싶었다”며 “불법을 저지르고 선을 넘으면서까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박동호의 판타지 같은 방식에 시청자들이 대리만족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박동호의 몰락으로 정의로운 세상이 구현됐을지 묻자 “또 다른 악인이 오고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돌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답했다.

‘돌풍’은 설경구가 주연을 맡은 첫 드라마다. 1990년대 ‘큰 언니’ ‘사춘기’ ‘코리아 게이트’ 등의 드라마에 조·단역으로는 출연했다. “좋은 작품이라면 어디든 출연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드라마 쪽에선 제안이 없었다”는 그는 김희애의 매니저를 통해 ‘돌풍’ 제작사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대본을 받고 5부까지 단숨에 읽었다. 단순하게 책이 재미있어서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차기작도 드라마다. 새 OTT 시리즈 ‘하이퍼 나이프’를 촬영하는 설경구는 “‘돌풍’을 찍으며 드라마에 대한 선입견이 확실히 깨졌다”고 말했다. 또 “얼마 전 전도연 주연의 연극 ‘벚꽃동산’을 봤는데 너무 부러웠다”며 “당장 연극 무대로 뛰어들 자신은 없지만, 현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만큼 꾸준히 연기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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