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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으로 보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왜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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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미국에서 7년, 유럽에서 1년을 거주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모국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을 제외하고서라도 한국에서의 삶이 상대적으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수한 치안, 높은 의료접근성, 깨끗한 인프라, 빠르고 친절한 서비스와 행정, 상대적으로 낮은 전기세와 교통비는 다른 나라에서 누리기 힘든 장점이다. 그래도 높은 집값과 식료품비, 치열한 경쟁이 힘든 것은 사실이기에 한국에 사는 것은 항상 양가 감정을 갖게 한다.

올해 3분기 전기요금이 동결된 지난달 21일 서울의 한 주택가에 설치된 전력 계량기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는 지난해 2분기 인상 이후 5분기 연속 동결로 한전의 누적적자를 고려하면 추가 인상이 필요하지만, 정부가 물가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요금 인상 논의는 4분기로 넘어가게 됐다. 뉴스1

올해 3분기 전기요금이 동결된 지난달 21일 서울의 한 주택가에 설치된 전력 계량기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는 지난해 2분기 인상 이후 5분기 연속 동결로 한전의 누적적자를 고려하면 추가 인상이 필요하지만, 정부가 물가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요금 인상 논의는 4분기로 넘어가게 됐다. 뉴스1

왜 한국에서의 삶이 어떤 면에서는 만족스럽지만, 다른 면에서는 힘들까. 한국은행이 지난달 발간한 ‘우리나라 물가수준의 특징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어느 정도 의문을 해소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소득을 고려한 우리의 물가수준은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여 평균 정도다. 식료품, 의류, 주거 비용은 OECD 평균보다 현저히 높지만 전기, 도시가스, 대중교통 등 공공요금은 크게 낮다. 그래서 평균이다.

그런데 주요국과의 품목별 가격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식료품 가격은 1990년 OECD 평균의 1.2배 수준에서 2023년 현재 1.5배 이상으로 높아졌다. 반면 공공요금은 1990년 OECD 평균의 0.9배 수준에서 최근 0.7배로 낮아졌다. 농산물은 낮은 생산성과 개방도, 비효율적 유통구조 때문에 주요국보다 더 비싸다. 반면 공공요금은 정부정책 영향으로 주요국 중 최저 수준이다. 전기, 도시가스 요금은 생산비용보다도 낮은 편인데, 2022년 기준 원가보상률이 도시가스는 39%, 전기는 64.2%였다.

해당 보고서에서 생산비용 대비 낮은 공공요금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당연하다. 이는 에너지 과다소비, 공공서비스 질 저하, 그리고 세대 간 불평등 등의 문제로 이어진다. 현재 한국전력의 누적부채는 200조원이 넘으며, 올 한해 지불해야 하는 이자만 4조7000억원으로 추산된다.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전체 169만 가구(2022년 기준)에 에너지바우처로 250만원씩 지급하고도 남는 금액이 이자로 사라지고 있다. 한국전력의 부채상환 계획은 미지수인데, 어쨌든 미래세대의 소득에서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달 26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공무원 보수위원회에 대한 민주노총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공무원 단체교섭권 보장과 임금 대폭 인상 등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6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공무원 보수위원회에 대한 민주노총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공무원 단체교섭권 보장과 임금 대폭 인상 등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재의 생활비 구조로 알 수 있는 우리 경제의 문제점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부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은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결국 공공부문의 희생으로 버티는 셈이다. 비단 부채가 쌓이고 있는 한국전력, 한국가스공사, 코레일, 서울교통공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무원노조는 공무원 임금인상률이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해 실질소득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으며, 이는 저연차 공무원들의 퇴직률을 높인 주요 원인이라며 임금인상을 촉구했다. 대학은 무려 16년째 등록금을 동결하여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둘째, 이렇게 아낀 생활비는 생산성이 낮거나 비효율적인 부문으로 지출되고 있다. 우리나라 경작지 면적은 1명당 0.3ha로 매우 작고, 영농규모도 영세하여 농업 노동생산성은 OECD 국가 중 하위권에 속한다. 생산농가가 영세하기 때문에 도매업체나 소매업체의 시장지배력이 클 수밖에 없다. 농산물 소비자 가격에서 유통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1999년 39%에서 2022년에는 50% 수준으로 높아졌다. 앞으로 농가의 고령화가 심화하고,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기후가 속출하면 농업부문의 취약성은 더 짙어질 것으로 보인다.

6월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3.84(2020년=100)로 작년 같은 달보다 2.4% 올랐다. 수산물과 축산물은 안정적 흐름을 보였지만, 농산물이 13.3% 상승했다. 김은 28.6% 상승해 1987년 12월(34.6%)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사진은 2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 연합뉴스

6월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3.84(2020년=100)로 작년 같은 달보다 2.4% 올랐다. 수산물과 축산물은 안정적 흐름을 보였지만, 농산물이 13.3% 상승했다. 김은 28.6% 상승해 1987년 12월(34.6%)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사진은 2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 연합뉴스

저렴한 공공비용으로 아낀 생활비가 높은 의식주 비용으로 지출된다면 개인으로서는 이쪽 주머니에서 나갈 돈이 저쪽 주머니로 나가는 의미 없는 일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생산성 낮은 분야로 돈이 흘러 들어감으로써 서서히 침몰하는 일이다.

현재의 왜곡된 상황은 과거 20여년간 활동했던 모든 정치인의 책임이다. 그들은 임기 동안 가격을 통제하고 구조개선을 미루면서 우리의 생활 수준이 평균적으로는 나빠지지 않았다고 국민이 ‘착각’하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정부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격은 국민물가 부담을 고려하여 국민이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유지될 공산이 크다. 반면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구조개선은 미뤄놓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물가수준과 물가상승률은 다르다. 물가상승률이 낮아져도 물가수준이 높다면 우리의 삶은 여전히 팍팍할 것이다. 특정 산업의 물가수준이 지나치게 높다면 생산성을 높이고 공급 채널을 다양화하며 비효율적인 유통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언제까지 공공부문 종사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미래세대의 소득을 끌어다 쓰면서 사회를 유지할 수는 없다. 10년 후에도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여전히 살만한 곳일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이번 보고서처럼 전문가들의 수준 높은 분석이 열린 논의의 장을 좀 더 마련해준다면 약간의 희망은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