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임종주의 시선

‘수 대결’에 탐닉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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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종주
임종주 기자 중앙일보
임종주 정치에디터

임종주 정치에디터

“게티즈버그는 매우 끔찍했고,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 아름다웠다.” 두어 달 전 게티즈버그가 있는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주 유세에서 나온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엊그제 대선 1차 TV토론에선 주가를 한껏 띄운 그였지만, 핵심 경합 주에선 이 한마디로 한바탕 된서리를 맞았다. TV 심야쇼와 소셜미디어에선 “철부지 중학생의 독후감 수준” “뇌가 어떻게 된 사람의 말 같지 않은 소리”라는 조롱이 쏟아졌다.

미국 게티즈버그에 있는 링컨의 얼굴상(왼쪽)과 워싱턴DC 링컨 메모리얼에 각인된 게티즈버그 연설문. 중앙일보

미국 게티즈버그에 있는 링컨의 얼굴상(왼쪽)과 워싱턴DC 링컨 메모리얼에 각인된 게티즈버그 연설문. 중앙일보

게티즈버그는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된 최대 격전지였다. 1863년 7월 1일부터 사흘간 5만명 넘는 병사가 전사하거나 다친, 잔인하고도 참혹한 기억이 서린 곳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시신 7000여구가 쓰러진 군마 5000여필과 뒤엉켜 썩어갔다고 한다. 도처에 악취가 진동했고, 수습에 나선 주민들은 새까맣게 몰려든 쉬파리 떼와 싸우며, 삽질과 구역질을 번갈아 해야 했던 혼돈의 땅이었다. ‘미(美)’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가당치도 않았던 것이다.

그해 11월 피로 물든 게티즈버그를 신성한 땅으로 헌정하는 국립묘지 봉헌식이 열렸다. 3분가량의 짧고도 강렬했던, 우리에게도 익숙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이 담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이때 나왔다. “링컨은 추악한 현실을 소중하고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변형시켰다. 오직 272개 단어만을 사용해 그 일을 해냈으며, 그 단어들보다 더 강력한 호소력을 갖춘 것은 없었다”(『게티즈버그 연설 272단어의 비밀』). 게티즈버그는 그렇게 미국 민주주의의 성소(聖所)가 됐다.

지난 6월 27일(현지시간) 진행된 CNN의 2024 미국 대선 1차 TV토론 화면. 바이든 대통령(오른쪽)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 중 연신 단상 위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면서 절반씩 분할해 송출된 화면은 트럼프의 호통에 바이든이 고개를 숙인 듯한 장면이 지속적으로 노출됐다. CNN 캡처

지난 6월 27일(현지시간) 진행된 CNN의 2024 미국 대선 1차 TV토론 화면. 바이든 대통령(오른쪽)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 중 연신 단상 위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면서 절반씩 분할해 송출된 화면은 트럼프의 호통에 바이든이 고개를 숙인 듯한 장면이 지속적으로 노출됐다. CNN 캡처

트럼프가 게티즈버그를 넘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공화당 대선 후보로 첫 출전했던 2016년 10월 ‘취임 100일 구상’을 밝힌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4년 뒤 재선 도전 땐 후보 수락 연설을 게티즈버그에서 하겠다고 했다가 거센 반발을 샀다. 민주주의 성지가 특정 정파를 위해 활용돼선 안 된다는 정서적 금기를 자극한 것이다. 트럼프의 게티즈버그 출정식은 결국 좌절됐다. 겉으론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면서도 내심 링컨의 반열을 꿈꿨던 그의 속셈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이 지난 2021년 1월 6일(현지시간)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인증하기 위한 상·하원 합동회의가 열리고 있던 워싱턴 연방의회 의사당 건물로 난입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이 지난 2021년 1월 6일(현지시간)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인증하기 위한 상·하원 합동회의가 열리고 있던 워싱턴 연방의회 의사당 건물로 난입하고 있다. 연합뉴스

게티즈버그의 저항은 미국 민주주의 태동지이자 마지막 보루라는 자존심의 표출이었다. 동시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트럼프 팬덤의 대선 불복(2020)과 의회 난입(2021),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해임 파동과 의정 마비(2023), 반복된 예산안 갈등과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 등은 이념적 편향성·양극화 심화로 타협과 신뢰의 가치를 상실한 미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거기엔 정도와 양태만 다를 뿐 정치 불신·혐오의 늪에 빠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또한 투영돼 있다.

근래 그 위기를 악화시키는 주범의 하나로 도드라진 게 다수결 만능주의다. 다수결 기본 원리에 대한 망각, 무지, 몰이해에서 비롯된 결과다. 필연적으로 독주·폭주의 속성을 벗기 어렵다. 민주사회에선 다수의 의지에 따라 최종적 판단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수적인 개념에만 매몰되면 그때부터 숫자는 속칭 '깡패'가 된다. 우리는 그간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힘의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폭력적 사례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다수결 원리는 단순히 숫자의 크고 작음을 초월해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그 품으로 끌어안으려는 과정에서 합리성을 확보한다. 정치학자로 현실 정치에도 참여했던 장을병은 저명한 법학자·정치학자였던 한스 켈젠을 인용해 “진정한 다수결의 원리는 소수의 의견이 전기반응처럼 다수 안에 반영될 때만 성립된다”고 설파했다(1986). 다수결이 독재·전체주의의 지탱 원리로 변질하는 것을 막으려면 다수가 소수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총의를 모으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는지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국회 개원부터 입법 독주로 ‘흔들’
소수 배제, 다수결 기본 원리 변질
타협과 합의로 정치 복원 나서야

‘민의의 전당’ 국회를 움직이는 양대 축은 국회법과 관례다. 국회법 의사결정 조항은 다수결 원리 위에 성안됐고, 관례는 타협과 합의를 기반으로 한다. 민주적 합의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충동을 누르고 절제하는 미덕을 발휘할 때 도달할 수 있다. 그 길이 멀고 걸리적거린다고 지나쳐가면 관례는 와해하고, 그 틈은 극단적 강자의 논리가 파고든다.

서너 해 전 이맘때 직접 찾아가 봤던 게티즈버그에선 지금 161주년 행사가 한창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독립기념일(4일) 밤엔 성대한 불꽃놀이도 펼쳐진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사수하려는 의식들이다. 그 출발은 민주주의 기본 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이라는 점을 요즘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