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행 드라마’ 양희영 “그저 얼떨떨…포기했던 올림픽 출전 믿기지 않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LET 아람코 사우디 레이디스 인터내셔널 현장에서 만난 양희영. 리야드=고봉준 기자

지난 2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LET 아람코 사우디 레이디스 인터내셔널 현장에서 만난 양희영. 리야드=고봉준 기자

“사실 파리행은 포기 상태였어요. 우승은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죠.”

지난달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 대회를 제패하며 2024 파리올림픽 출전권을 극적으로 따낸 양희영(35)을 2일 전화로 만났다. 숨 가쁜 전반기 일정을 마치고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양희영은 “지금도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얼떨떨하다”면서 “메이저 대회에서 꼭 우승하고 싶다고 말은 하고 다녔지만, 실제로 이뤄질지 몰랐다. 또,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던 파리올림픽 출전권까지 따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며 웃었다.

양희영은 지난달 24일 끝난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7언더파 281타를 기록하고 정상을 밟았다. 2009년 데뷔 후 처음으로 맛본 메이저 대회 우승이다. 이전까지 5승을 거두는 동안 ‘메이저 퀸’ 칭호를 얻지 못했지만, 75번째 출전한 메이저 대회에서 한을 풀었다.

최종라운드 중반까지 여유롭게 단독선두를 달리다가 후반 들어 보기(16번 홀)와 더블보기(17번 홀)가 연달아 나와 마음을 졸이게 한 양희영은 “내 골프 스타일이 원래 그렇다. 초반에는 긴장했다가 중반 들어 안정을 찾는다. 그러다가 후반 들어 다시 긴장하곤 한다”면서 “그런데 이번에는 최종라운드 내내 가슴이 진정되지 않더라. 마음을 다스리느라 혼났다. 다행히 2위 그룹과의 격차를 미리 벌려놓아서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6 리우올림픽에서 함께 태극마크를 단 김세영과 박인비, 박세리 감독, 양희영, 전인지(왼쪽부터). 사진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16 리우올림픽에서 함께 태극마크를 단 김세영과 박인비, 박세리 감독, 양희영, 전인지(왼쪽부터). 사진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또 다른 수확도 있다. 바로 파리올림픽 출전권이다. 이번 우승으로 여자골프 세계랭킹을 25위에서 5위로 끌어올려 3위 고진영(29), 13위 김효주(29)와 함께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양희영은 “KPMG 여자 PGA 챔피언십 직전 두 대회에서 연속 컷 탈락했다. 샷 감각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아서 걱정이 컸다”고 했다. 이어 “우승을 해야 턱걸이로 파리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파리올림픽은 포기 상태였다. 우승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결과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고 웃었다.

양희영은 이번 메이저 대회 우승으로 선수로서 이룰 것은 모두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LPGA 투어에서 6승을 거뒀고, 2016년에는 리우올림픽과 인터내셔널 크라운에선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다. LPGA 투어 통산상금도 지금까지 1555만달러를 벌어들여 1826만달러의 박인비(36) 다음으로 많다.

지난달 24일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샴페인 세례를 받는 양희영. AFP=연합뉴스

지난달 24일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샴페인 세례를 받는 양희영. AFP=연합뉴스

그러나 이러한 커리어와 상관없이 올해 초부터 파리올림픽만큼은 꼭 나가고 싶다며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이유를 묻자 양희영은 “리우올림픽 때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최고의 동료들과 나라를 대표한다는 일이 그토록 뜻깊은 일인지 처음 알았다”면서 “리우올림픽에선 1타 차이로 메달을 놓쳤다. 이번에는 든든한 후배들인 (고)진영이, (김)효주와 함께 메달을 노려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올 시즌 한국 선수들은 LPGA 투어에서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개막 후 15개 대회가 지나가는 동안 다른 나라 선수들이 정상을 밟는 장면을 지켜만 봤다. 그러나 양희영이 16번째 대회에서 포문을 열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양희영은 “이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선수들의 기량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과 태국, 일본 선수들의 실력이 크게 향상되면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정도”라고 단언했다. 이어 “다행히 나를 비롯해 한국 선수들의 컨디션이 정상 궤도로 올라오고 있다. 막힌 혈이 뚫린 만큼 남은 대회에선 계속해 승전보를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지난해부터 화제가 된 스마일 이모티콘이 그려진 흰색 벙거지 모자를 웃으면서 가리키고 있는 양희영. 리야드=고봉준 기자

지난해부터 화제가 된 스마일 이모티콘이 그려진 흰색 벙거지 모자를 웃으면서 가리키고 있는 양희영. 리야드=고봉준 기자

양희영은 올 시즌 내내 스마일 문양이 그려진 벙거지 모자를 쓰고 필드를 누비고 있다. 2022년을 끝으로 메인 후원사(우리금융그룹)와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로고가 없는 모자를 써야 했는데 볼마크로 쓰던 ‘:)’ 이모티콘이 우연히 떠올랐다. 민무늬 모자보다는 작은 문양이라도 있는 모자가 좋겠다 싶어서 지금의 벙거지 모자를 특별 제작했다. 아직은 새 메인 스폰서 계약 이야기는 없다는 양희영은 “오히려 모자 앞면이 비니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더 긍정적으로, 더 행복하게 골프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원동력이 생겼다”고 했다.

양희영은 11일 개막하는 에비앙 챔피언십 출전을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이어 CPKC 여자 오픈 출전을 위해 캐나다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파리올림픽 출전이 확정되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훈련과 휴식을 병행하기로 했다. 파리올림픽 골프 여자 경기는 8월 7일 프랑스 파리 외곽의 르골프 내셔널에서 개막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