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삐라 집어던지며 고성∙욕설…40년 전 회담서 무슨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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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4월3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제2차 남북한 체육회담이 진행되고 있다. 통일부 제공, 뉴시스

1984년 4월3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제2차 남북한 체육회담이 진행되고 있다. 통일부 제공, 뉴시스

남북이 40여년 전 '삐라'를 서로 집어던지며 거친 설전을 벌인 사실이 LA올림픽 단일팀 구성문제를 협의했던 1984년 남북한체육회담 회의록을 통해 재확인됐다.

2일 통일부가 공개한 1981년 12월부터 1987년 5월까지의 인도·체육 분야 남북회담문서(1693쪽 분량)에 따르면 북한은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1983년 10월)과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등의 문제로 회담에서 수세에 몰리자 남측의 삐라 살포를 트집 잡아 회담을 지연시켰다.

北 "삐라 살포는 불순한 도발 행위…"

북한 대표는 당시 "오늘 새벽 귀측 해당 기관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우리측 지역 일대에 우리를 비방·중상하는 내용의 선전삐라들을 다량 살포했다"며 "첫 체육 회담을 몇 시간 앞두고 벌어진 이 전례 없는 삐라 살포사건은 우리 측을 모독하고 회담 앞에 인위적인 난관을 조성하려는 매우 불순한 도발 행위"라고 주장했다.

남북한 대표가 1984년 체육회담에서 '삐라'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내용이 담긴 회의록. 통일부 제공

남북한 대표가 1984년 체육회담에서 '삐라'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내용이 담긴 회의록. 통일부 제공

이어 북측 대표는 "이게 뭐야, 이게! 이거 보라!"고 외치며, 챙겨온 전단을 남측 대표를 향해 던졌고, 남측 대표도 즉각 반발하며 "누구한테 무례한 짓을 하고 있어!"라며 전단을 되던졌다.

여기에 더해 남측 대표는 김씨 일가까지 직격했다. "귀측의 부자세습왕조 구축과 우상화는 자유세계는 물론 심지어 공산권 내부에서까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면서다.

이에 북한 대표단은 물론 취재진까지 고성과 욕설을 쏟아내며 회담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와 관련, 회담 문서는 "북한 측 대표들은 우리측 대표가 발언하는 도중에 우리측 대표에게 성냥갑을 던졌다"며 "북한 기자들까지 합세해 기물로 책상을 계속 두드리고 우리측 대표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1980년 9월 출범 직후 남북관계에서 두 가지 과제를 중요한 현안으로 여겼다. 하나는 같은 해 북측의 제의로 2월부터 8월까지 10차례에 걸쳐 판문점에서 진행됐던 '남북한 총리회담' 실무 대표 접촉이 중단된 상황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일성 주석이 같은 해 10월 제안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과 대안을 마련하는 문제였다.

정공법을 선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2년 1월 22일 국정 연설을 통해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 발표와 함께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 회담' 개최를 위한 남북 쌍방 각료급 예비회담을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 당시 부주석 명의의 담화로 격을 낮춰 비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비난하고 남측의 회담 제의를 거부했다.

아웅산 테러가 터닝 포인트 

이런 기류는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을 계기로 전환됐다. 버마 당국의 수사 결과 북한 소행으로 결론이 나자 각국에서 북한과의 단교는 물론 "향후 수교할 수 없는 국가"라는 선언까지 이어지면서 외교적 고립이 심화했기 때문이다. 이는 남측과 국가 정통성을 두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승인 외교전을 벌이던 북한 입장에선 치명적인 결과였다.

1985년 평양에서 여동생을 상봉하는 지학순 주교의 모습.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1985년 평양에서 여동생을 상봉하는 지학순 주교의 모습.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결국 북한은 아웅산 폭탄 테러 3개월 후 북·미와 한국이 참여하는 3자 회담을 제안했고, 이듬해인 1984년 3월 말에는 두 달밖에 남지 않은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논의하자고 제의해왔다. 하지만 당시 판문점에서 열린 3차례의 남북한체육회담은 공성전을 거듭하다가 북한이 다른 공산권 국가의 LA올림픽 보이콧 결정에 합류하면서 아무런 성과 없이 종료했다.

통일부가 이번에 공개한 남북회담 문건에는 1984년 10월 수해물자 인도·인수와 1985년 9월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을 협상한 과정도 담겨있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북한보다 국력이 앞서 있다는 판단 하에 남북대화를 적극적으로 제의했다. 특히 전 전 대통령은 1984년 8월 20일 기자회견에서 '남북한 물자교역 및 경제협력'을 제의하며 대북정책을 추진했다.

정치적 비난을 내놓으며 수세적으로 대응하던 북한은 돌연 적십자사를 통해 남측에 '남조선 수재민 구호를 위한 물자제공 제의'를 밝혔다. 이에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북측의 제의를 수락했다.

이와 관련, 양영식 전 통일부 차관은 저서 『통일정책론』에서 "대통령의 경협제의보다 천재지변인 수재가 남북대화의 돌파구를 연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며 "북측의 수재 물자 제공 제의를 과감히 받기로 한 당시 정부의 결단은 평가받을 만한 것이었다"고 기술했다.

최초 물자교류·이산상봉도

남북은 실무접촉에서 우여곡절 끝에 1984년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6일에 걸쳐 판문점·인천항·북평항 지역에서 수해물자 인도·인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대한적십자사가 북측 적십자 대표, 수송요원, 기자들에게 846개 분량의 선물을 전달하면서, 남북 분단사 최초의 물자교류가 이뤄졌다.

1985년 인천항에 도착한 북한의 남한 수재민 지원 물자의 모습.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1985년 인천항에 도착한 북한의 남한 수재민 지원 물자의 모습. 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수해지원으로 물꼬를 튼 남북은 85년 5월 제8차 남북적십자 회담에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상호교환과 예술단 교환 공연에 합의했다. 이를 위해 1985년 7월 15일부터 8월 2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실무대표 접촉이 이뤄졌는데, 남북은 상호 입장을 수용·절충해 같은 해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3박 4일간 동시 교환 방문 방식으로 역사적인 이산가족 상봉과 예술단 교환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번에 공개된 남북회담 문서에서 북한은 명분과 필요에 따라 빗장을 열고 대화 테이블로 나오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 북한 특유의 '살라미식' 협상 방식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호령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은 "북한이 협상을 지연하거나 중단하고 재개하는 과정의 패턴이 80년대에도 그대로 나타났다"며 "전제조건을 달고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다음 협상에 임하는 방식은 지금과도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 문서 공개는 2022년(2∼6권)과 지난해(7~10권) 각각 상·하반기 공개에 이은 다섯 번째다. 통일부가 이날 공개한 문서에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발표(1982.1) ▶버마아웅산 묘소 폭발사건(1983.10) 및 북한의 3자회담 제의(1984.1) ▶남북한 체육회담(1984.4~5) ▶남북한 수재물자 인도·인수(1984.9~10) ▶제8~10차 남북적십자회담(1985.5∼12)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1985.9) 진행 과정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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