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항암치료 놓쳐 암 재발"…3월 상급병원 진료 61% 급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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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방침에 반발해 지난 2월 전공의가 병원을 이탈했고, 의대 교수의 집단 사직서 행렬이 이어졌다. 지난 3월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들과 방문객이 이동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방침에 반발해 지난 2월 전공의가 병원을 이탈했고, 의대 교수의 집단 사직서 행렬이 이어졌다. 지난 3월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들과 방문객이 이동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백혈병 남성 환자 A씨는 올해 고강도 항암 치료를 받고 암세포가 5% 미만으로 줄어든 관해(寬解) 상태가 됐다. 여기에다 추가로 1~2회 항암 치료를 해서 재발 가능성을 없애는 항암요법(공고요법)을 하고,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을 받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의대 증원을 두고 의사 집단행동이 시작되면서 이 시기를 놓쳤고 그 새 암이 재발했다. A씨는 4월 말 어쩔 수 없이 다시 고강도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A씨가 다시 항암 치료를 받지만, 치료 성적은 종전보다 크게 떨어진다"며 "백혈병 등의 혈액암 환자가 3월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봤다"고 말한다.

의대 증원 관련 의사 집단행동의 여파가 예상보다 훨씬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는 1일 "2월 의사 집단행동이 시작된 후 3월 진료비 변화를 분석했더니 상급종합병원의 진료가 60% 넘게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의대 증원 파동 이후 전체 의료기관의 실제 진료 변화를 집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에는 개별 병원이 임시로 추계했고 수술이 30%가량 줄었다는 정도만 알려졌다.

복지부는 이번에 상급종합병원 47곳, 종합병원 328곳, 병원 1338곳, 동네 의원 3만2197곳 등의 전체 건강보험 진료비(비급여는 제외)를 분석했다. 의료기관이 진료하면 법정 본인부담금(진료비의 20~60%)은 당일 환자한테 받고, 나머지는 건강보험에 청구한다. 그러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를 거쳐 건강보험공단이 지급한다. 이 과정이 두 세 달 걸린다. 그래서 3월 진료분이 지금 집계된 것이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지난 3월 상급종합병원 환자는 105만3000여명으로 지난해 3월(226만3000여명)보다 121만명(53.5%) 줄었다. 진료 건수로는 61.4%, 진료비는 53.2% 줄었다. 외래 진료 감소가 충격적이다. 외래 진료 환자 수는 56%, 진료 건수는 63%, 진료비는 65% 줄었다. 상급병원들이 상당수 외래 환자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외래환자를 못 보니 입원 환자도 덩달아 줄었다. 상급병원 입원 환자(39%)와 진료 건수(41%)가 비슷하게 줄었고, 진료비는 45% 줄었다.

안기종 대표는 "상급종합병원은 암·심장병·장기이식 등의 중증 환자가 집중되는 곳이다. 상급병원의 '진료 60%' 감소는 예상을 뛰어넘는다"며 "갑작스레 연기 통보를 받은 환자들이 금방 회복될 것이라고 믿고 참고 기다렸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안 대표는 "연기된 진료가 4월 중하순에 조금씩 재개될 때까지 중증 환자들이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 고통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이모(58)씨는 올 1월 초 서울의 대형병원에서 폐암 확진 판정을 받고, 3월 초 수술하기로 날을 잡았다. 그런데 2월 말 수술 무기 연기 통보를 받았다. 기약 없이 기다리던 중, 3월 말에야 "5월 중순에 수술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른 데로 옮기면 이보다 더 나을 게 없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기다리다 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 환자는 5월 수술까지 불면의 나날을 보냈다. 수술이 또 연기될지 몰라 초조해서다. 폐암은 다른 암보다 진행 속도가 빠르다고 알려져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상급종합병원만큼은 아니지만, 그 이하급 의료기관 환자도 줄었다. 종합병원은 0.6%, 병원급은 7.9%, 동네 의원은 1.1% 줄었다. 전공의의 급작스러운 이탈로 인해 3월엔 환자들의 움직임이 전반적으로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 중증 환자가 상급병원의 진료를 기다릴 수 없어 종합병원으로 이동하면서 감소 폭을 줄인 것으로 분석된다. 종합병원의 환자는 소폭 줄었지만, 진료비가 6.2% 증가한 게 이 때문이다. 특히 입원 진료비가 8.8% 뛰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병원의 B원장은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받지 못한 중환자가 종합병원으로 일부 이동했다"며 "중증도가 높다 보니 진료비가 높게 나왔고, 그게 종합병원 진료비 증가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3월에는 큰 병원 환자가 본격적으로 이동하지 않은 것 같다. 4, 5월 진료비를 집계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B원장은 "3월의 충격파가 너무 컸고, 그게 4월까지 이어졌다. 5월 들어 상급종합병원들이 진료지원인력(PA)을 활용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하면서 다소 회복하기 시작했다"며 "그렇다고 해도 현재 환자 수나 진료 건수가 이번 파동 이전의 80%에도 못 미친다"고 말했다. 5월 들어서야 상급종합병원 환자가 그 아랫급 의료기관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원 분류=병상이 100개 넘으면 종합병원, 30~99개이면 병원이다. 의원은 29개 이하를 둘 수 있다. 종합병원 중 20개 이상 진료과목을 갖추고 전공의가 수련하며 고난도 의료를 제공하면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한다. 단계에 따라 진료비 가산율(의원은 15%, 상급종합은 30%)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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