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북·러 밀월 어떻게 볼 것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지난 6월 19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다. 원래 1박 2일로 예정된 방문이 지각대장 푸틴의 늦은 도착으로 인해 ‘1일 방문’이 되었다는 뉴스도 눈길을 끌었지만, 무엇보다도 역사학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1945년 해방부터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까지 소련군의 역할에 대한 푸틴의 발언이었다.

“1945년 소련 군인은 북한 애국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본 침략자들로부터 해방을 위해 싸웠습니다. 1950~1953년 해방전쟁에서 우리 조종사들이 수만 번의 전투 비행을 했습니다.” 푸틴의 발언은 해방과 전쟁이라고 하는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두 변곡점에서 소련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방북한 푸틴, 북한 해방 및 한국전쟁 때의 소련군의 기여 언급
북한은 1960년대 이후 역사책에서 소련군의 역할 거의 삭제

6·25 때 스탈린, 김일성의 지원 요구에 “탈출 준비하라” 편지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국제관계 … 북·러관계 다시 변할 수도

북한을 해방한 소련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9일 북·러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포괄적전략동반자협정’ 서명식 후 악수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9일 북·러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포괄적전략동반자협정’ 서명식 후 악수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미 알려진 내용임에도 주목되는 것은 북한이 지워버린 역사를 푸틴이 대중 앞에서 언급했다는 점이다. 많은 언론이 주목한 것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소련군의 참전 문제였지만, 북한 내부로 좁혀 본다면 소련에 의한 북한 지역 해방에 대한 언급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북한의 역사책에는 소련군의 역할에 대한 서술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50년대 말까지 소련에 의한 해방을 역사책에 서술했었다. 1958년 북한 역사연구소에서 출간한 『조선통사』에서는 1945년 이후의 역사에 대해 ‘쏘련군대의 북조선 진주’라는 항목으로 시작하면서 “1945년 8월15일 조선인민은 위대한 쏘련군대에 의하여 장구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으로부터 해방되였다”라고 서술하였다.

아울러 “쏘련군대에 의한 조선해방은 조선인민의 역사발전의 새 기원이 되었다”라고 평가하였다. 김일성이 귀국한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 채 “쏘련군대의 북조선 진주는 해방된 조선 인민을 제국주의의 새로운 침해로부터 보호하는 튼튼한 담보로 되었”다고 하여 소련군의 결정적인 역할에 대해 기술하였다.

역사책에서 사라진 소련군

1950년 3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 일행. 왼쪽 끝은 박헌영. [중앙포토]

1950년 3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 일행. 왼쪽 끝은 박헌영. [중앙포토]

소련군의 역할에 대한 서술은 1960년대 이후 점차 북한의 역사책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1964년의 『조선로동당력사교재』에는 소련군의 역할에 대한 서술이 거의 삭제되었고, 이후 1980년 해방35주년 기념 축전에서 소련군의 기여를 언급하였던 사실을 제외하고, 다른 역사서술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 개시 후 일주일 만에 일본 제국주의가 무조건 항복했다’고 서술하였다. 김일성의 회고록에는 자신의 귀국일이 9월19일이라고 썼다.

이후 북한의 역사책에서 소련군에 의해 38선 이북 지역의 해방과 북한 정부 수립과정에서 소련군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모두 사라졌다. 예컨대 1983년 북한에서의 한국사 연구를 집대성한 『조선전사』가 발간된 직후에 출판된 『현대조선역사』에서는 해방 과정에 대해 “조선의 해방은 김일성이 조직 영도한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승리가 가져다준 위대한 결실이었다”라고만 서술하고 있다.

북한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소련군의 진주와 원조에 의한 북한체제의 수립이라는 과정을 삭제해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지도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베트남전쟁에서 중국군의 역할이 사라진 것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푸틴 대통령의 방문 시 역사 속 소련군이 다시 부활하였다.

소련 공군 참전에 대한 CIA 보고서

6·25전쟁 발발 12일 만에 격추된 야크 전투기. 소련 지원을 위장하기 위해 소련군 표식을 지우고 북한군 마크를 그려 놓았다. [중앙포토]

6·25전쟁 발발 12일 만에 격추된 야크 전투기. 소련 지원을 위장하기 위해 소련군 표식을 지우고 북한군 마크를 그려 놓았다. [중앙포토]

한국전쟁 당시 소련군의 참전문제는 또 다른 중요한 이슈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된 스탈린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소비에트 공산정권의 몰락 이후 대부분 알려졌다. 1949년과 1950년 김일성의 소련 방문과 스탈린과의 회담을 통한 전쟁 승인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데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 문서와 연구성과를 통해 공개된 것이다.

문제는 푸틴이 언급한 이슈가 전쟁 개전 당시 스탈린과 소련 정부의 역할에 대한 부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푸틴은 전쟁 당시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마저도 숨기려고 했었던 소련 공군의 참전을 언급했다.

1951년 3월 30일 자 CIA 문서를 보면 전선에서 러시아의 비행사들이 확인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전날 미공군 안보부에서 보낸 정보에 근거한 것이다. 제9육군항공단 소속으로 추정되는 소련공군 비행사들이 한반도의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서에는 1951년 1월부터 소련공군이 참전했고, 앞으로 더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는 논평이 함께 달려 있다.

당시 소련은 무기의 지원 외에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을 대외적으로 알리려 하지 않았다. 참전 조종사들은 계급장이나 휘장이 없는 중국군 군복을 입어야 했고, 통신 과정에서도 가급적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못 하게 했다고 한다.

3차 세계대전을 원하지 않았던 미·소

소련군의 참전을 알리지 않으려고 한 것은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1950년 11월 14일 자 주소(駐蘇)미국대사의 문서에는 소련의 참전 징후는 없으며, 중국을 공격의 앞발로만 사용하려고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소련이 아직도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원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소련 공군이 참전 관련 정보가 올라갔음에도 1951년 7월 10일의 국무성 극비문서 ‘국가정보평가’ 32호에서는 북한군과 중국군이 사용하는 무기 중 탱크를 제외하고 소련산 무기가 예상보다 많지 않다고 보고했다. 소련이 지원한 전투기에 언급은 나오지만, 한반도 내 소련 공군의 활동은 전혀 논의하지 않고 있다.

동년 9월 25일 자의 미국 국가안보회의 비밀문서에서도 소련이 한국에서 점점 더 많은 기술자를 공급하고 있고, 이들이 방공망이나 레이더 장비, 탱크에 대한 자문을 위해 활동하고 있지만, 전투부대가 직접 한국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정보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소련군이 유엔군의 안전을 위협할 일이 없다는 것이 이 문서의 결론이었다.

역사 속의 불편한 북·러관계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까지도 소련 공군의 직접 참전에 대해서 외부로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미국과 소련이 모두 한국에서의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공산군 측은 정전 협상에서 중립국 감독위원단에 소련을 포함하자는 황당한 주장까지 하였다.

이상과 같이 푸틴이 언급했던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러시아와 북한의 협력은 북한 역사책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지울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한국전쟁에서 스탈린의 역할은 언급하지 않은 반면, 북한이 부인해왔던 해방 과정에서 소련군의 역할과 전쟁 당시에는 소련마저도 감추려고 했던 소련공군의 참전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겉으로만 본다면 푸틴의 이러한 선택적 언급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 정부가 부인하고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한 사실을 언급했다는 점, 스탈린 시대의 불균형적 북·러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대신 전쟁에서 양국의 군대가 함께 피를 흘렸다는 혈맹 관계를 강조했다는 점은 그 의미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해소되기 어려운 역사적 감정

그렇다면 푸틴의 이러한 언급으로 북·러 간의 불편한 관계는 모두 사라지는 것인가? 북한은 인천상륙작전 직후 위기 상황에서 소련의 태도를 잊지 않을 것이다. 북한군의 방어망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지원 요구에 대해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의 탈출을 준비해야 한다”는 절망적인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1950년 10월 13일).

소련은 중국의 참전을 독려하면서 직접 파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전 협상의 타결을 반대하면서 미국과 중국을 한반도에 잡아두려 했다. 1956년 소련 20차 당 대회 이후 스탈린 격하, 1960년대 역사 왜곡에 대한 북한의 항의, 소련의 대국주의에 대한 북한의 비판 등 역사적 갈등관계에도 주목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세계정세의 변화로 북·러 간의 전략적 관계가 강화되었지만, 서로에게 불편한 내용을 언제까지 용납할 수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북·러관계 역시 우리 하기에 따라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