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옛 기차와 철길, 32년 기관사 사진첩에선 오늘도 달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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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호 14면

28일 철도의 날, ‘철도 덕후’ 류기윤 KTX 기장

류기윤 한국철도공사 기장이 KTX 기관실에서 운행 준비를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류기윤 한국철도공사 기장이 KTX 기관실에서 운행 준비를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이 기관차는 딱 봐도 7000호대 초기형 새마을호예요. 후속 모델인 7100호대의 비둘기 도색과 엔진룸 난간이 없으니까요. 7000호대 기관차는 유선형 지붕에 파란색 띠 도색이 특징입니다. 이전까진 일본 기차처럼 지붕이 직각이었다가 미국제 디젤기관차 모습으로 바뀌었죠.”

지난 25일 서울역에서 만난 류기윤(52) 한국철도공사 KTX 기장이 눈을 반짝였다. 그의 손엔 철도청 광고가 실린 1973년 10월 22일자 신문이 들려 있었다. 전날 야간근무로 밤을 새워 피곤할 법도 한데 기차 얘기만 나오면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는 철도공사 내에서도 소문난 ‘철덕(철도 덕후)’이다. 철도 동호인들 사이에선 ‘성덕(성공한 덕후)’으로도 불린다. 30여 년간 철도 기관사를 업으로 삼으며 한국 철도의 역사도 꾸준히 사진에 담아온 ‘철덕’ 류 기장을 28일 ‘철도의 날’을 맞아 만나봤다.

일도 취미도 기차, 쉬는 날도 폐선 찾아

일과 취미 모두 기차다. 동호인들은 ‘덕업일치’의 표본이라며 부러워한다던데.
“스스로도 ‘성덕’이라고 생각한다(웃음). 어렸을 때부터 기차를 좋아해 새 기차가 나온다고 하면 영등포역·구로역 가리지 않고 구경하러 다녔다. 기관사 되는 게 유일한 꿈이라 대학 진학 대신 1992년 철도공사 공채 시험을 봤다. 구경만 하던 디젤기관차 부기관사로 처음 일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일제시대 건설된 동해선 초곡터널. 지금은 삼척 레일바이크 통로로 활용 되고 있다. [사진 류기윤 기장]

일제시대 건설된 동해선 초곡터널. 지금은 삼척 레일바이크 통로로 활용 되고 있다. [사진 류기윤 기장]

류 기장은 “‘덕질’을 잘하려면 우선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입사 후 지금까지 150만㎞ 무사고 운전 중이고 퇴직 전에 200만㎞ 무사고 기록을 세우는 게 목표입니다. 야근하면 이틀이 휴일이라 이때 주로 취미를 즐겨요. 지난주엔 강원도 태백의 오래된 철길을 찾아갔어요. KTX 기관사로는 기계에 둘러싸인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살고, 주말엔 옛 선로나 폐역을 찾아다니는 아날로그적인 삶을 살고 있는 셈이죠.”

철도 사진은 언제부터 찍기 시작했나.
“1937년 개통한 수인선 협궤선로가 95년 말 폐선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인선을 오가던 기관차 중 아직 남아 있는 거라도 기록에 남겨야겠다 싶어 카메라를 들었다. 내가 '기록'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나중엔 선배들이 먼저 폐차 계획이 있는 기차를 알려주기도 했다. 지금까지 찍은 필름 사진이 2880장, 디지털 사진은 55만 장가량 된다. 직접 촬영한 사진 외에도 과거 철도 사진이나 시간표·광고·모형 등 철도와 관련된 모든 걸 수집하는 말 그대로 ‘덕후’다.”
1937년 개통된 수인선의 유일한 협궤터널. 95년 수인선 폐선 직후의 모습을 류 기장이 사진에 담았다. [사진 류기윤 기장]

1937년 개통된 수인선의 유일한 협궤터널. 95년 수인선 폐선 직후의 모습을 류 기장이 사진에 담았다. [사진 류기윤 기장]

류 기장은 “특히 계량되기 이전의 장항선 옛 노선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고 말했다. 천안역과 익산역을 연결하던 장항선은 2세대 새마을호의 마지막을 함께한 노선이자 기관사들 사이에선 중앙선과 함께 로컬선의 대명사로 꼽혔다. 류 기장은 "철도가 점점 고속화·직선화되면서 구불구불한 로컬선은 점차 사라지는 분위기"라며 아쉬워했다.

“고속 주행을 주로 하는 경부선은 쭉 뻗은 선로를 잘 달리기만 하면 되지만 S자형 노선과 오르막 내리막이 고루 있는 장항선 옛 노선은 수많은 연습이 필요했어요. 새내기 기관사들이 운행 감각을 키우기 위해 주로 가던 장항선은 제겐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죠.”

기관사로 일한 지도 32년째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비둘기호부터 최근 도입된 KTX-청룡까지 어지간한 기관차는 다 타봤다. 폐차되기 직전 관광용으로 운행하던 증기기관차도 탔다. 석탄가루가 날려 앞을 보기도 힘들 만큼 일이 고됐지만 ‘철덕’이니 그조차 재미있었다. 열차 최고 속도가 시속 100㎞에 불과했던 시절엔 바깥 풍경 좋은 곳이 나오면 승객들이 감상할 수 있게 일부러 60㎞까지 줄이거나 기적을 울리기도 했다. 속도를 늦추는 걸 기관사들끼리는 '굴린다'고 표현하는데 그때만 해도 기차 타는 분들이 창밖 풍경을 볼 때라 정시에 도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많이 굴렸다(웃음).”
기적 소리라니 낭만적으로 들린다.
“기관사는 계절의 변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직업이다. 기관실에 있으면서 이 풍경을 객실에서 보면 어떨까 상상하곤 했다. 30년 넘게 기관실에 있지만 단 하루도 똑같은 풍경은 없다. 해가 뜨고 질 때, 꽃이 피고 단풍이 들 때 자연의 풍경이 기관실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하다.”

“너무 빠른 KTX…낭만과 속도는 반비례하는 듯” 

그는 그러면서 “KTX를 도입한 지 올해로 20년째인데 운행 중에는 나조차도 앞만 보기 바쁘다”고 했다. “바깥 풍경이 너무 쏜살같이 지나가다 보니 여행하는 모습도 많이 달라졌어요. 승객들도 타자마자 창문 가리개 내리고 핸드폰 보기 바쁘죠. 아무래도 낭만과 속도는 반비례하는 것 같아요.”

철도에 있어서 기록이 왜 중요한가.  
“세월이 흐르면서 기관차뿐 아니라 기찻길 옆 풍경도 달라지고 간이역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런 철도의 산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곧 우리 근현대사를 기록하는 것과 다름없다. 경주에 가면 1930년대 사철이 다니던 선로 옆에 협궤가, 그 옆에 표준궤가, 또 옆에 고속철도까지 4개의 선이 나란히 놓여 있다. 100년의 세월이 '선로'에 남아 있는 거다. 이처럼 사라지는 철도를 기록에 남기는 건 철덕이자 철도인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다 싶다.”

류 기장은 이제껏 모은 사진과 자료를 언젠가 박물관에 기증할 계획이다. “철도는 장소를 이어주는 교통수단인 동시에 제겐 시간과 인생을 이어주는 친구 같은 존재죠. 앞으로도 힘닿을 때까지 철도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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