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총선 극우파 약진에 떨고 있는 파리 오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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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호 16면

한정호의 예술과 정치

2022년 대선 승리 축하공연을 마친 메조 소프라노 파라 엘 디바니의 손에 입맞추는 마크롱.

2022년 대선 승리 축하공연을 마친 메조 소프라노 파라 엘 디바니의 손에 입맞추는 마크롱.

올해 여름 올림픽이 개최되는 프랑스 파리는 공연 예술의 메카로 통한다. 그중에서도 최정점은 파리 국립 오페라(Opera national de Paris)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페라하우스이자 샤를 드골의 제5공화국 정치체제가 유지되는 지금까지 정치 권력의 향배에 따라 오페라 극장의 리더십 역시 민감하게 반응했다. 오페라와 발레, 관현악을 다루는 파리 국립 오페라의 터전은 두 곳이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배경이 된 가르니에 극장(Palais Garnier)과 바스티유 감옥 자리에 지은 바스티유 오페라(Opera Bastille)다. 미테랑 정권 시절엔 바스티유 오페라를 오페라 전용관, 가르니에 극장을 발레 전용관으로 분리 운영하고자 했으나 이젠 두 극장이 오페라와 발레를 섞어 시즌을 난다. 복수의 대형 오페라 극장이 오페라와 발레로 매일밤 관객을 잘 채우는 도시는 이곳과 베를린 정도다.

르펜 “미친 반인종주의” 니프 맹비난

파리 국립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에서 선거 유세하는 마린 르펜 전 국민연합 당대표. [AFP=연합뉴스]

파리 국립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에서 선거 유세하는 마린 르펜 전 국민연합 당대표. [AFP=연합뉴스]

파리 국립 오페라 뿐 아니라 파리의 클래식과 발레 공연 시장은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끝으로 8월말까지 모두 쉰다. 1994년 8월초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에서 해임된 정명훈이 법정 투쟁을 이어갈 때, 그를 지지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오프라인에서 연대하지 못한 것도 바캉스 탓이다. 발레리나 박세은이 소속된 파리 오페라 발레단도 파리 군중이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7월 14일까지만 공연하고 시즌을 접는다. 파리 올림픽이 열리는 올해만 예외적으로 7월 20일 가르니에 극장에 파리 오페라 발레단원이 출연하는 ‘아파치’가 올림픽 문화 축전 행사로 열린다.

평상시라면 휴가 준비로 들뜬 이 시기, 파리 오페라 구성원들의 관심은 온통 선거판에 가있다. 6월 30일 갑자기 치러지는 프랑스 총선 때문다. 이달 초 유럽의회 선거에 패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하원을 해산하고 여는 조기 총선이다. 예전 같으면 사회당, 공화파 보수당 노선을 살피면 어느 정도 차기 내각의 문화 정책과 파리 오페라의 미래를 점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공식도 2017년 제3세력 마크롱의 대통령 당선으로 무너졌다. 이번 총선은 여론조사상 극우 국민연합(RN), 좌파 신인민전선(NFP)이 마크롱의 여당 ‘르네상스’를 앞서고 있어 종전과 다른 분석의 틀이 필요하다.

여론조사대로 국민연합이 제1당을 차지한다면, 29세 조르당 바르델라 당대표가 총리에 오르고 신임 각료를 임명하는 동거정부 구성이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국민연합이 내세울 신임 문화부 장관이 누구냐에 따라, 파리 오페라 총극장장 알렉산더 니프의 거취도 결정될 것이다. 2021년 파리 오페라 총극장장에 취임한 니프는 올해초 마크롱 정부의 라치다 다티 문화부 장관 제청으로 2032년까지 임기를 보장받았었다. 하지만 니프의 미래는 정명훈의 과거를 보면 답이 보인다.

1993년 총선 결과 미테랑의 사회당은 자크 시라크의 우파 공화국연합(RPR)에 패했고 동거정부가 구성됐다. 우파 입장에선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사회당 주도로 건립한 바스티유 오페라는 ‘손 볼’ 곳이었고, 사회당이 임명한 정명훈은 ‘저쪽’ 사람이었다. 우파 연립 정부는 당시 자크 투봉 문화부 장관, 알랭 쥐페 법무부 장관을 앞세워 사회당 시절 임명한 파리 오페라의 요직을 물갈이했다. 무명의 정명훈을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에 끌어들인 ‘프랑스 예술계 큰 손’ 피에르 베르제를 극장장에서 경질했고, 1994년 9월 정명훈도 음악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권을 노리던 시라크는 파리 국립 오페라에서 사회당 잔재를 지우는 형태로 미테랑에 도전했고, 1995년 대통령 선거 승리로 결실을 봤다. 대선을 앞둔 동거정부가 엘리제 대통령궁을 향해 벌인 대리전의 전장이 파리 오페라였던 셈이다.

국민연합이 다수당을 차지할 경우, 어떤 문화 정책으로 마크롱과 차별화를 보여줄 것인지는 현지 관련 학자들도 예측이 어렵다. 국민연합은 총선 대표 공약으로 불법 이민자 대상의 의료 지원 폐지, 국경 통제 강화를 걸었지만 문화 정책 총론은 공개된 게 없다. 다만 과거 2017, 2022년 대선 과정에서 마린 르펜 전 국민연합 대표가 내놓은 캠페인에서 단서를 찾을 순 있다. 당시 르펜은 국가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헤리티지를 ‘도덕성 회복의 장소’로 만드는 작업을 문화 정책으로서 홍보했다. 전체적으로 국민연합은 문화 분야에서 정부를 구성할 디테일이 약하다.

반면, 파리 오페라의 현 지도부를 향한 르펜의 시각은 뚜렷하다. 2021년 니프가 주도한 파리 오페라 인종주의 개선 보고서에 대해, 르펜은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이 반인종주의의 미명하에 파리 오페라 레퍼토리를 삭제하려 한다”면서 니프의 행동을 “미친 반(反)인종주의”로 맹비난했다. 니프가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총극장장 자리를 보전할지 우려하는 근거다.

한편으론 국정 운영에서 문화 정책을 소홀히 한 양측 태도가 오히려 쉽게 타협할 공간을 마련할 수도 있다고 보인다. 대통령궁과 동거정부가 공연 예술 분야에서 크게 부딪힐 분야는 다문화주의 정도다. 파리 오페라의 니프를 두고도 임명은 ‘저쪽’이 했지만 국민연합에선 그로부터 원하는 바를 취할 여지가 있다. 바로 대 러시아 관계 개선이다.

테오도르 쿠렌치스

테오도르 쿠렌치스

친러 노선의 국민연합이 흡족할 프로그램이 2024/25 시즌 파리 오페라 프로그램에 들어 있다. 파리 오페라는 내년 1월 라모 오페라 ‘카스토르와 폴뤽스’의 지휘를 러시아 지휘자 테오도르 쿠렌치스에게 맡기고, 악단과 합창단도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쿠렌치스가 운영하는 유토피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들인다. 쿠렌치스는 전쟁 지지의 명시적 표현만 없을 뿐 사실상 친푸틴 성향 인사와 기관 후원으로 본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승승장구 중이다. 함부르크, 잘츠부르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서방 진영이 쿠렌치스를 보이콧하는 마당에, 파리 오페라의 쿠렌치스 초대가 반러 입장이 분명한 마크롱 정부에서 이뤄져 이례적이다.

2019년 12월 파리 오페라 발레단원들이 가르니에 극장 앞에서 연금 개혁 반대 퍼포먼스를 벌인 이후, 파리 오페라를 되도록 멀리하는 마크롱의 무관심을 틈타, 니프가 ‘바로크의 이단아’를 가르니에로 불러들인 것이다. 마크롱이 파리 오페라 공연 관람에 나선 것도 지금은 자리를 떠난 구스타보 두다멜 음악감독의 2021년 음악감독 취임 연주회 정도다. 동거정부 기간 마크롱이 파리 오페라에서 국민연합과 대결한다면, 쿠렌치스 공연이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

루이 14세 때 권력의 애정이 낳은 산물

2019년 파리 오페라 발레단원들의 연금개혁 반대 시위. [AFP=연합뉴스]

2019년 파리 오페라 발레단원들의 연금개혁 반대 시위. [AFP=연합뉴스]

마크롱은 집권 내내 파리 국립 오페라를 비롯한 공연 예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크롱은 아미앙 국립지방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공부했고 지역 콩쿠르에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평소 클래식 음악에 관한 깊은 소양과 지식에 비하면, 이런 행보는 정치인 마크롱의 ‘전략적 무관심’으로 읽힌다. 약 10년 동안 악기를 전공하다시피 했지만, 정치 입문 이후 자신의 음악 경력이 자칫 본인이 그리는 대중 정치인상을 잠식하지 않도록 대외 이미지를 조절한다. ‘클래식이나 즐기는’ 늙은 기성 정치 엘리트와 거리를 두는 전략이다.

2017년 대선 기간 대중 연설에서 목소리 톤을 지적받자 프랑스 바리톤 장 필립 라퐁에게 보이스 교정을 받았고, 2022년 대선 승리 축하 자리에서 프랑스 국가를 부른 이집트 메조 소프라노 파라 엘 디바니에게 감사의 키스를 전하며 미디어가 원하는 그림에 클래식을 이용하는 정도다. 정치인의 문화적 취향이 문화 예술 정책의 부흥으로 이어지리라는 관성적인 예측 역시 마크롱은 무너뜨렸다.

유럽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오페라하우스는 정치권력의 부침에 따라 흥망을 달리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21세기가 그랬다. 루이 14세 시절부터 프랑스 권력의 애정이 낳은 산물인 파리 국립 오페라는, 문화적 효용을 활용할 줄 아는 사회당, 공화파 보수당의 기성 정치 권력과 공생하며 성장했다. 집권을 꿈꾸는 제3세력이 파리 오페라의 활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최대 피해는 결국 파리 오페라가 입는다.

한정호 공연평론가·에투알클래식 대표. 런던 시티대 대학원 문화정책 매니지먼트 석사. 발레리나 박세은, 축구인 박지성 등 예술 체육계 명사의 에이전시와 문화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에투알클래식 대표를 맡고 있다. 월간 객석, 일본 오케스트라연맹에서 일했고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다양성위원회 민간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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