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소설·영화 속 미래 사회, 왜 암울한 풍경이 많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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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호 26면

[이태환의 세상만사 경제학] AI와 기본소득

1982년에 만들어진 SF영화의 고전, ‘블레이드 러너’는 어둑어둑한 LA의 모습이 천천히 다가오는 광경으로 시작한다. 비가 끊임없이 추적추적 내리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아주 암울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엄청나게 큰 피라미드 모양의 건축물이 나타난다. 타이렐사(Tyrell Corporation) 건물이다. 창업자 타이렐은 안드로이드 노동자 레플리컨트를 독점생산해서 막대한 경제력을 갖게 된 기업인인데, 영화에서 묘사된 그의 모습은 거의 전제군주 느낌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거대기업 타이렐사. [사진 워너 브라더스]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거대기업 타이렐사. [사진 워너 브라더스]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은 2019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2024년인 지금 ‘인간보다 더 인간같은’ 레플리컨트를 독점생산하는 타이렐사와 같은 기업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다수의 기업들이 매일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이러한 경쟁시장 체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의사결정이 분산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장에서 활동하는 가계와 기업들은 모두 스스로의 효용이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결정을 각각, 따로따로 내린다. 시장은 그런 모든 자율적인 의사결정들을 모아서 가격이라는 신호를 만들어 내고, 그에 따라 생산과 소비가 적절하게 배분된다.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것과 반대쪽에 있는 것이 중앙집권적인 의사결정 방식이다. 생산이나 소비에 관련된 결정을 어느 하나의 기업이나 기관이 한다. 20세기 공산주의 소비에트 국가들에서 시행된 계획경제 체제 하에서는 생산수단을 중앙정부가 독점했고 소비재는 배급이 기본이었다. 시장을 완전히 독점한 민간기업이 있다면 단일 기업, 또는 타이렐 같은 개인에게 생산을 결정하는 권한이 집중된다.

거대 기업·권력이 경제 독점·통제

재미있는 것은 미래사회를 그린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이런 독점기업이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체제가 종종 등장한다는 점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범죄를 미리 예측하는 기술을 가진 거대 독점기업이 나오고, ‘브라질’에서는 과거의 역사까지 고쳐 쓸 수 있는 파시스트적 정부가 존재하는 통제사회가 그려진다. 이제는 일상적 단어가 되어버린 ‘빅 브라더(Big Brother)’를 등장시킨 소설 『1984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왜, 미래를 그린 많은 소설이나 영화가 이런 중앙집권적인 통제사회나 독점적 경제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성의 향상이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생산규모가 커지면 단위비용은 낮아지고 생산성은 높아진다. 규모의 경제, 분업의 효과, 노하우 축적 등등. 그래서 경제가 발전하다 보면 몇몇 기업은 다른 기업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생산성을 획득하여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게 되기도 한다. 20세기 초 카네기나 록펠러는 타이렐에 버금가는 경제권력을 누리면서 피라미드 대신 카네기홀과 록펠러센터를 지었고, 지금도 반도체나 농산물 종자산업, 스마트폰 운영체제 등에서는 소수의 기업들이 전세계 시장을 과점하고 있다. 이런 추세를 미래로 몇십 년 연장하면서 상상력을 약간 가미하면, 우리가 소설에서 종종 보는 거대 독점기업이나 통제사회가 머릿속에 쉽게 그려진다.

주인공(해리슨 포드)의 임무는 도망친 레플리컨트(인간형 로봇)를 찾아 ‘은퇴’시키는(제거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로봇이 인간을 은퇴시킬지도 모른다. [사진 워너 브라더스]

주인공(해리슨 포드)의 임무는 도망친 레플리컨트(인간형 로봇)를 찾아 ‘은퇴’시키는(제거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로봇이 인간을 은퇴시킬지도 모른다. [사진 워너 브라더스]

독점이나 독재는 그렇다 치고, 이렇게 생산성이 높아진 미래사회를 그리는 영화가 암울한 이유는 뭘까.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사람의 노동이 같은 양 들어갔을 때 더 많은 생산물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니까 일단 좋은 일이긴 한데, 뒤집어 생각하면 같은 양을 생산하는 데 고용을 덜 해도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노동생산성 향상은 우리가 요즘 걱정하는 ‘고용없는 성장’이나 ‘노동 소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미래 SF의 분위기가 암울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대개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18세기 산업혁명 발생 이래 지금까지, 이러한 노동절약적 기술혁신은 언제나 근로자들의 크고 작은 저항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것은 러다이트 운동이었는데, 19세기 영국에서 방직업이 기계화되니까 방직공들이 기계를 때려 부숴버렸다. 뉴욕시의 가스등이 전등으로 교체될 무렵인 1907년에는 가로등 불 켜는 일을 하던 사람들 600명이 파업을 했다고 한다. 생산성의 향상이 인류 전체에게 분명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고 피해를 보는 사람이 발생하곤 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느냐, 그리고 사회가 이 사람들을 보살필 만한 역량과 시간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일자리가 넉넉한, 성장하는 경제에서는 상대적으로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예를 들어 실직자들에게 실업수당을 일정기간 주면서 새로운 일자리에 취직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교육할 수 있다. 좀 더 전통적으로는 자식들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워서 취직한 다음 부모를 부양하기도 했다. 20세기 중반 한국에서 논 팔고 소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낸 농민들을 생각해 보면 쉽다. 물론, 재정지출을 이용해서 기초생활보장급여 등의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앞으로는 어떨까.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AlphaGo)’가 2016년에 이세돌 9단을 바둑에서 꺾고, 오픈AI가 2022년말 챗GPT를 내놓으면서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10년 전까지는 기계가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물리적 힘을 보태주거나 단순 반복적인 작업을 돕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동안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 즉 패턴인식, 판단, 새로운 것에 대한 학습까지 기계가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들이 등장하면 앞으로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혁신이 훨씬 빠르게, 한꺼번에 진행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미국에서 트럭 운전을 하는 사람이 300만 명이 넘는다. 지금 이미 시험주행을 하고 있는 자율주행 트럭이 실제로 도입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조금 더 먼 미래에 트럭 운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생산을 인공지능과 로봇이 담당하게 된다면 경제체제는 어떻게 될까. 인간의 노동이 필요 없으니, 현재와 같은 근로소득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하지 않아도 기초생활이 보장되게 만드는 소위 ‘기본소득’ 제도가 어떤 형태로든 필요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생산에 필요한 자본, 인공지능, 로봇 등을 소유한 특정 민간회사나 정부가 생산에 필요한 의사결정들을 독점하고, 거기서 나온 부가가치를 전국민이 기본소득 형태로 받아간다는 얘기다.

공산주의 독재가 미래 모습일 수도

영화 ‘메리 포핀스 리턴즈’(2018)에서 20세기 초 가스 가로등 켜는 일꾼들. 기술 발달에 따라 사라진 직종 중 하나이다. [사진 월트 디즈니]

영화 ‘메리 포핀스 리턴즈’(2018)에서 20세기 초 가스 가로등 켜는 일꾼들. 기술 발달에 따라 사라진 직종 중 하나이다. [사진 월트 디즈니]

중요한 것은 그런 미래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긍정적인 시나리오를 먼저 보자면,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평균 노동시간이 차츰 줄어들면서 기초생활보장이 점점 확대되고, 그러다가 마침내 기본소득 제도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수 있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인공지능과 로봇을 활용해 생산을 하고 국민들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는 형태일 수도 있고, 타이렐사와 같은 민간회사가 있으면서 그 주식이 전국민에게 골고루 분배되어 있는 형태도 가능하다. 사람들은 생계 걱정 없이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급자족 경제와 시장경제가 적당히 섞인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먹고 싶은 빵을 직접 구워 먹다가, 조금 많이 구우면 소규모 판매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말로 이런 세상이 온다면 이상적이겠지만, 부정적인 시나리오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에 의해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지쳐 폭력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 독재정부가 자리를 잡는 시나리오. 국가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고, 소수의 지배계급이 생산수단을 독점하며, 일반 대중은 간신히 생존할 수준의 배급만 받고 살아가는 세상. 앞으로 수십 년 뒤 우리 앞에 어떤 시나리오가 펼쳐질까.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갈림길일지도 모른다.

새 연재물 ‘이태환의 세상만사 경제학’을 시작합니다. 우리 주변의 문화·사회·정치 현상을 경제학으로 해석해서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나가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필자인 이태환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는 서울대와 스탠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한국경제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했습니다. 지식 전문 플랫폼 SERICEO에서 5년 간 ‘세상만사 경제학’ 강의를 맡기도 했습니다.

이태환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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