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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과 포퓰리즘 확산…마크롱은 승부수를 던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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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U의회 선거 이후 유럽 정치 변화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격변기에 치러진 2024년 유럽의회 선거는 평소보다 많은 관심을 불러왔다. 유럽연합(EU) 차원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선거는 각국의 정치 상황을 반영하는 풍향계 역할을 한다. 선거 결과는 여론조사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게 중도 우파를 중심으로 한 중도계 정당들의 과반수 확보와 함께 우익 포퓰리즘과 극우 진영의 약진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유럽의회 선거 개표가 시작된 6월 둘째 일요일인 지난 9일 저녁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프랑스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선언은 유럽 전역을 순식간에 경악시켰다. 프랑스에서 28살의 젊은 지도자 조르당 바르델라가 대표를 맡은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RN)은 32%의 최다 득표율로 집권당인 중도 성향의 르네상스당 연합을 배 이상 따돌렸다.

출구 조사가 발표되고 나서 마크롱 대통령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무시할 수 없는 결과”라며 “국민에게 다시 의회의 미래에 대한 선택권을 돌려드리겠다”는 연설로 조기 총선을 발표했다.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 “민족주의자들과 선동가들의 부상은 유럽과 세계에서 프랑스의 위치에 위협이 되고 프랑스를 몰락시키게 됩니다.”

극우 성향 프랑스 국민연합, EU의회 선거 32% 득표…주류로 급부상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선언하며 긴급 대응
한국은 개방적 보수와 민족주의 진보의 대립, 포퓰리즘 흡입력 커져
변화 요구를 중도 정치권이 수용할 수 있어야…용기와 포용이 관건

프랑스 조기 총선은 ‘정치적 도박’

프랑스 국민연합(RN)의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와 당원들이 지난 2일 유럽의회 선거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프랑스 국민연합(RN)의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와 당원들이 지난 2일 유럽의회 선거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2022년 대통령에 재선한 뒤 프랑스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잃은 마크롱 대통령에게 조기 총선은 커다란 도박이다. 전체 577석 중 마크롱이 속한 집권당은 169석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중도 정당 동맹의 81석을 더해도 과반수에 미치지 못한다.

현재 프랑스 정치 상황은 엄중하다. 이미 제2당의 지위에 오른 국민연합은 “힘을 제대로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포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은 24%에서 30%대 초반을 맴돈다. 집권 8년 차에 접어든 정치적 피로감도 상당하다.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점점 사그라질 것이 분명하다. 앉아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제2의 삶을 얻을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거대한 정치적 실험장이 되어가고 있는 프랑스에서 조기 총선을 앞두고 새로운 합종연횡이 등장하고 있다. 마크롱의 집권당은 중도좌파-중도-중도우파 간의 연합구도로 극단주의 세력에 맞설 것을 주장하며 “미워도 다시 한번”의 정치적 인내를 호소한다. 총선에서 자력으로 살아남지 못한다면 공동의 적에 대항해 연합해야 한다. 그마저도 안 될 것 같으면 동거정부라는 극단의 선택으로 차기 정권의 재창출을 위한 반전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 경험상 동거정부에 참여하는 반대진영의 성공률은 반반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던진 주사위 패다. 신의 한 수인지, 무리한 패착인지는 다음 달 말 파리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에 결정 난다. 개막식에 등장할 마크롱 대통령의 표정에서 결과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민자 급증에 미래 불안감 확산

프랑스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선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선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에서 포퓰리즘이 득세하게 된 데에는 상호 관련된 요인들이 얽혀 있다. 임금 정체, 높은 실업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행한 긴축 정책들은 경제적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전통적인 정치와 제도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초래했다. 나눠 먹을 파이가 작아지면서 더 이상 유럽인들은 부유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거기에 이민자와 난민 유입이 증가하면서 문화적 통합과 국가 정체성에도 우려가 제기됐다.

파리에서 만난 프랑스 정치혁신재단(Fondapol)의 도미니크 레니에 소장은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질문에 짧은 침묵을 두고 대답했다. “많은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엘리트에 의해 통제되는 정치 시스템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죠. 사람들은 경제적 미래에 대한 통제감을 상실해 가고, 이민자의 증가는 자신의 생활방식을 위협한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실감은 포퓰리즘으로 이어지죠.”

다문화를 포용해 온 프랑스에서 이민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의 난민과 이민자들은 과거처럼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섬처럼 겉돌기 시작했다. 레니에 소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최악의 경우 내전과 같은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극단주의 부상에 정치 지형도 변화

포퓰리즘과 극단주의의 부상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흐름이 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주의도 맥을 같이한다. 제도권 밖의 변수로 여겨졌던 극단주의 정당들이 이제 주류 진영을 넘보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극단주의는 실망감과 불만족을 먹고 큰다. 다양성과 관용이 실종된 대신 포퓰리즘은 쉽고 간결한 언어로 기존 정당이 회피했던 사회불안·이민과 같은 이슈들을 전면으로 부각했다.

소셜미디어의 부상은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전통 미디어를 우회하며 유권자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게 했고, 알고리즘은 기존의 견해를 강화하는 정보들만 노출하며 급진화의 여지를 제공했다.

젊은 유권자들의 극단주의 선호도 눈에 띄게 올라가고, 환경정책으로 인한 비용 증가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도 포퓰리즘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오랜 기간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간의 경쟁이 됐던 정치 지형은 중도와 극단 진영 간의 대결로 바뀌고 있다. 쉽고 직접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이다의 정치’를 구현하는 포퓰리즘에 비해 중도 주류 정치는 설득과 양해를 위한 어려운 언어를 구사하며 국민에게 ‘미지근한 물’을 마실 것을 호소한다. 증오를 외치는 정치는 양해를 구하는 정치보다 언제나 유권자에 다가가기 쉽다. 반면 어려운 경쟁 지형에 놓인 중도 진영이 활용할 정책 수단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건전재정’ 앞세운 중도우파 인기 하락

혁신과 건전재정을 강조하는 중도우파는 인기 없는 정책을 반복해야 하는 숙명을 갖는다. 복지국가가 이미 성숙한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가 갖는 입지도 점점 약화하고 있다.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렵고, 하나를 취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정책적 딜레마에 당면한 정부는 합리성의 이름으로 불가피하게 차선의 선택을 하게 마련이다. 반면 최선의 선택을 주장하는 포퓰리즘은 현실을 부정하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제시하지만 정책의 장기적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 본 경험은 없다.

한국은 교과서적인 극우와 극좌가 적용되기 힘든 나라다. 보수 진영이 개방화·세계화에 가까운 반면 진보 진영은 민족주의와 결부되면서 반세계화·보호주의 성향을 가진다. 양당제로 나뉜 정치지형은 중도에서부터 강경 포퓰리즘 노선까지 하나의 진영으로 통일할 것을 요구하고, 거기에 강한 지역적 투표 성향까지 반영되면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상이한 정치 양태를 보인다.

오히려 극우와 극좌는 종종 정치적 상대편을 폄하하는 냉소적인 의미로 쓰인다. 나보다 오른쪽 옆에 있으면 극우, 왼쪽 옆에 있으면 극좌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그런데도 ‘쉬운 선택’을 주장하는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의 흡입력은 크게 다르지 않다.

포퓰리즘에 의한 민주주의 위기

합리성에 기반을 둔 중도정치는 포퓰리즘의 도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일상에 지친 국민은 변화를 원하지만, 동시에 예측 가능한 안정성도 기대한다. 관건은 변화를 제시하고 불만족에 대답할 수 있는 중도 진영의 포용성에 있다.

인기에 영합하는 사이다의 끝은 갈증과 당뇨다. 하지만 탄산과 당분을 섞지 않고도 지지를 유지하려면 그만큼 개방적이고, 유연하고, 안정적이고, 전문적이어야 한다. 미지근한 물 대신에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뜨겁게 바꾸어 가며 유권자들에게 다가가서,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의견을 들어야 한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위치한 유럽대학연구소(EUI)의 파트리시아 난츠 총장도 포퓰리즘에 의한 민주주의 위기에 강하게 동감했다. “포퓰리즘은 전통적인 민주적 제도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엘리트’에 대항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표방합니다. 결국 국민의 참여가 중요합니다. 공론을 거치는 숙의민주주의만이 포퓰리즘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더 좁고 어두운 통로를 통해 비쳐지고 있다. 유럽도, 미국도,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에는 쉬운 답과 어려운 답이 있다. 어렵더라도 옳다고 판단된 선택을 했을 때 그걸 설명하고 공감대를 만드는 것은 용기다.

강한 대통령제와 거리로 나서는 정치문화를 지닌 프랑스는 한국 정치와 때로는 놀랄 만큼 유사한 사이클을 보여 왔다. 좌우 진영은 다르더라도 과거 니콜라 사르코지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현재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도는 같은 시기 한국 대통령들과 흡사했다. 자신을 다시 도마 위에 올린 마크롱의 뚝심에 관심이 기울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