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음악, 영화보다 더 생생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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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ET의 모습은 아직도 아련한 추억으로 마음에 남아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울려 퍼지는 멜로디는 더욱 생생하다. 영화음악의 거장 존 윌리엄스(J Williams)가 작곡한 메인 테마 선율이 흐르고, 그 선율이 오케스트라로 화려하게 전개되면서, ET는 하늘 너머 우주로 자신의 무대를 확장하는 느낌을 준다. 뭔가 벅차오르는 감정이 고양되는 순간이다. 사실 이때 나오는 선율은 단순하다. 5도 상행하고 순차적으로 하행하는 음들, 그리고 다시 한번 5도 하행한다. 몇몇 음들의 조합이 영화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우리의 판타지는 음악을 통해 아주 쉽게 자극되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볼 수 없으나 생생하게 움직이는 정신세계를 형상화하여 살과 뼈로 옷 입히려 한다”고 했던 쇼펜하우어가 옳았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를 강렬하게 형상화할 수 있고 직접적인 감동을 준다. 이런 음악이 보이는 대상과 만났을 때 그 시너지 효과는 더욱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음악은 바로 그런 음악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여름의 더위가 한창 시작된 지난 6월 21일 또모 오케스트라가 주최한 ‘더 시네마 & 클래식’ 공연(롯데 콘서트홀)에서 이런 영화음악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1부에서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피아니스트 임동민의 협연으로 연주되었고, 2부에서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이 소개되었다. 또모 오케스트라는 이런 유형의 음악회를 전문적으로 연주한 단체답게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오가며 개성 있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영화에 몰입감을 더하는 음악
콘서트홀서 만나니 더욱 매력
추억 소환한 여름밤의 연주회

일러스트=김지윤

일러스트=김지윤

2부의 첫 곡은 영화 ‘해리 포터’에 나오는 ‘헤드위그의 주제’였다. 신비한 분위기를 주는 스타카토의 주제 선율이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선율은 건반악기에서 관악기로 또 현악기로 바뀌어 가며 반복되고, 점차 음향이 확대되며 마법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핑크빛 조명으로 무대가 바뀌면서, 히사이시 조(Hisaishi Joe)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메인 테마 ‘인생의 회전목마’가 피아노 독주로 흘러나왔다. 왈츠풍의 현악기 반주는 서늘한 우울함을 선사했고, 타악기의 리드미컬한 진행은 쇼스타코비치의 스타일을 연상시켰다. 템포는 늘어졌다가 한순간 빨라졌고 다시 자연스럽게 늘어지면서 소녀 소피와 할머니가 된 소피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 ‘이웃집 토토로’ 역시 히사이시 조가 음악을 담당했는데, 도토리나무의 요정 토토로와 메이의 판타지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연출하는 익살스럽고 경쾌한 분위기로 표현되었다.

‘라라랜드’ 음악도 반가웠다. 담백하게 연주되는 피아노 선율은 청중을 영화 속 카페로 초대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지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주인공은 상상 속의 여행을 한다. 그 여행이 다채로운 음악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왈츠풍의 우아한 현악 파트의 부드러움, 트럼펫의 청량함, 플루트의 가벼운 반짝거림, 바이올린 독주의 애잔함은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의 상상 속 만남을 깨알같이 표현했다. 오케스트라는 어느 순간 재즈풍으로 변하면서, 트롬본의 매혹적인 선율이 부각되었고, 트럼펫과 현악 파트의 대조는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을 연출했다. 또모 오케스트라가 공을 들인 음악은 ‘맨 오브 스틸’이었다. 빨간색의 무대 조명을 배경으로 금관악기가 트레몰로로 긴박하게 연주되고, 4대의 콘트라베이스 사운드가 튜바와 만나고, 피아노와 심벌즈가 만나면서 압도적인 음향을 끌어 올렸다. 음향 그 자체로 몰입도가 높은 연주였다.

‘인터스텔라’ 음악은 무대를 우주의 한가운데로 변모시켰다. 블루 라이트로 바뀐 무대와 연주자의 악보에 핑크빛으로 조명이 비추어질 때 롯데 콘서트홀의 트레이드마크인 오르간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우주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연출되었다. 오르간과 타악기의 사운드가 합쳐지면서 우주선의 도킹 장면 역시 실감 나게 그려졌다. 한스 짐머(Hans Zimmer)의 이 곡은 사운드가 공감각을 얼마나 리얼하게 그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음악이 없는 영화는 상상하기 어렵다. 영화에서 음악은 극적인 전개에 힘을 실어 줄 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며,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상징하면서 영화에 선명한 색채감을 선사한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음악은 콘서트홀에서 연주될 정도로 그 자체로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시원하고 유쾌한 여름밤을 선사한 이 날 공연을 들으며 추억 속의 영화들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