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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리더십 공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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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안병억 대구대 교수(국제관계)

안병억 대구대 교수(국제관계)

유럽의 리더십 공백이 심각하다. 공백을 메울 길이 안 보이는 게 더 큰 문제다. 미·중 패권경쟁 격화, 두 개의 전쟁(우크라이나-러시아, 이스라엘-하마스),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 등 지정학적 불확실성의 고조로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정치블록인 유럽연합(EU)의 리더십이 필요한데 말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집행위원회 같은 공식 기구를 우회하여 비공식적으로 유럽통합을 이끌어왔다. 대개 양국 수반이 주요 의제를 사전 조율로 단일 의견에 합의한 후 유럽정상회담에서 집행위원장과 다른 회원국을 설득하는 형식을 취해왔다.

리더십 역량 약화는 독일에서 먼저 발생했다. 독일에서 2021년 12월 첫 ‘신호등 연정’이 출범했다. 가장 친기업적인 자유민주당(자민당)과 중도좌파 사민당과 녹색당이 꾸린 연정은 과감한 개혁이 쉽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지속으로 물가는 오르고 올해 0.1%의 경제성장률에 직면해 그 어느 때보다 지속적인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개혁이 필요한데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유럽의회 선거는 각 회원국 시민의 자국 정부에 대한 항의 투표 성격으로 결론났다. 독일의 경우 이민 폭증과 저성장, 연립정부의 지속된 정책 혼선 때문에 지난 9일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16% 지지를 얻었다. AfD는 제1야당인 기민당·기사당 연합에 이어 지지율에서 제2정당이 됐다.

프랑스 역시 9일 선거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정당 르네상스가 극우 국민연합(RN)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5.2%에 그쳤다. 이에 마크롱은 유권자의 메시지를 들었다며 조기 총선을 30일에 실시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극우 정당에 정부 운영을 맡길 거냐’는 벼랑 끝 승부수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극우 정당이나 급진좌파 4개 정당의 선거연합 등 그 어느 정파도 과반을 차지할 수 없어 정치적 불확실성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치 상황은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조기 총선 발표 후 지난 17일 기준으로 프랑스 증시에 상장된 프랑스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2580억 달러가 날아갔다. 유로존 국채 금리에서 기준 역할을 하는 독일의 국채와 프랑스 국채 간의 금리 격차가 이 기간에 0.3%포인트 벌어졌다(10년 만기 국채 기준). 프랑스의 정치 불안 때문에 외국 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줘야 프랑스 국채를 매입한다.

유럽을 이끌어온 독일과 프랑스의 지도자 모두 국내 정치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국내에서 리더십 부족으로 고전하는 지도자가 유럽 무대에서 리더 역할을 수행하기는 더 어렵다.

‘위기 때 최선의 배는 리더십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유럽에서 최선의 배는 당분간 쉽게 건조되지 않을 듯하다.

안병억 대구대 교수(국제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