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중국집 밑반찬 짜차이 잔혹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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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표 밑반찬 짜차이(榨菜). 바이두(百度)

중국의 대표 밑반찬 짜차이(榨菜). 바이두(百度)

우리나라 중국음식점에서 밑반찬으로 나오는 단무지는 생각해 보면 뜬금없기 그지없다. 일단 중국에는 없는 음식이고 굳이 그 뿌리를 따지자면 일본식 무 절임인 다꾸앙에서 비롯됐다.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요즘 일부 중국음식점에서는 단무지 대신 중국에서 많이 먹는 짜차이, 우리말로는 착채(榨菜)라고 하는 장아찌 무침을 제공하는 곳도 적지 않다.

짜차이라는 이 밑반찬, 알고 보면 사연 많은 음식이다.

우리와도 인연이 깊다. 우리 입장에서는 악연이다. 짜차이 과연 어떤 음식일까?

얼핏 보기에는 우리 무말랭이처럼 가늘게 썬 무채를 절여서 양념해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짜차이를 만드는 재료는 무가 아니다. 일종의 겨자 부리 같은 채소인데 우리나라에는 없는 채소니까 우리말로는 정확하게 옮기기가 어렵다.

중국에서 짜차이는 주로 서민들이 먹는 반찬이다. 예컨대 점심 무렵 중국 건설 현장을 지나다 보면 이른바 농민공이라고 하는 막일꾼 건설노동자들이 소가 없는 부풀린 찐빵 같은 음식, 중국말로 만터우에 짜차이를 반찬으로 올려놓고 먹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얼핏 빈민층이 먹는 반찬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대중음식점에서 밑반찬으로 내놓고 일반 가정집에서 국수나 만두, 밥 한 공기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때 반찬으로 먹기도 한다. 이렇듯 짜차이는 중국 서민들 그리고 노동자, 농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먹는 부식이다.

다소 뜬금없는 궁금증이지만 중국 서민들은 언제부터 짜차이를 밑반찬으로 먹기 시작했을까? 중국 문헌이나 인터넷 등을 찾아보면 짜차이가 생겨난 것은 송나라 무렵이라고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00년쯤 전이다.

짜차이라는 장아찌 무침의 역사가 생각보다 꽤 오래됐다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뜬금없이 왜 송나라일까 싶기도 한데 여기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아시아 채소의 역사가 감춰져 있다. 지금 우리를 비롯한 동북아에서 먹는 채소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는 김치의 재료가 되는 배추, 중국에서 즐겨 먹는 청경채, 그리고 일본에서 알게 모르게 많이 먹고 그래서 발달한 유채(油菜) 등이 모두 송나라 때 발달했다.

이들 세 채소는 모두 십자화과 작물로 그 뿌리는 순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송나라 때 순무에서 각각의 채소로 분화돼 퍼지면서 지금의 배추와 청경채, 유채로 특화됐다.

짜차이의 원재료인 징류제(茎瘤芥). 바이두(百度)

짜차이의 원재료인 징류제(茎瘤芥). 바이두(百度)

짜차이의 재료가 되는 착채(榨菜)라는 겨자 뿌리 모양의 채소 또한 송나라 때 특정 채소에서 분화돼 발달한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 인터넷 등에서 짜차이라는 장아찌 무침의 출현 시기를 송나라 때라고 주장하는 배경도 여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사실 중국 서민들이 언제부터 짜차이라는 장아찌 무침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런 서민 음식이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짜차이라는 장아찌 무침이 생겨나 퍼진 시기는 19세기 말로 추정한다. 그리고 중국 전역으로 퍼진 시기는 20세기 중반 무렵으로 보는데 이 대목이 우리나라와도 관계가 있다.

먼저 장아찌 무침인 짜차이는 1898년 쓰촨성 중경(重慶) 부근의 작은 마을(涪陵)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겨자 뿌리 같은 채소인 착채를 새로운 압착법으로 가공하는 방법을 개발해 채소의 수분을 완전히 제거했다. 그래서 이름도 기름이나 즙을 짜낸다고 할 때의 착(榨)자를 써서 짜차이가 됐다고 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민간어원설이다.

수분을 거의 제거한 장아찌 무침인 짜차이는 그 특성상 다른 어떤 채소 절임보다도 더 장기간 보관할 수 있고 물기를 제거했기 때문에 그만큼 가벼워져 상대적으로 대량 운송이 쉬워졌다. 뒤집어 말해 군인들이 먹을 부식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륙을 장악한 중국 공산당은 건국 이듬해인 1950년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정으로 짜차이를 중공군 보급품으로 지정한다. 그리고 착채의 수분 제거 압착 기술을 개발해 짜차이를 생산해 왔던 중경 부근 마을을 중공군 병참 지원을 위한 짜차이 생산기지로 육성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된 짜차이가 한국전쟁에 뛰어든 중공군의 부식으로 공급됐다.

휴전을 앞두고 전투가 치열했던 1952년 한 해 동안만 1000톤의 짜차이가 전선의 중공군에게 보내졌다. 이 무렵 중공군은 미군의 공습으로 낮에도 불을 피울 수 없어 볶은 밀가루 한 움큼을 뭉쳐서 입에 털어 넣고 반찬으로 짜차이를 먹으며 싸웠다고 한다.

짜차이는 한국전쟁 이외에도 1959년 티베트 주민들이 독립을 외치며 봉기했을 때 이를 진압한 중공군의 부식으로, 1979년 베트남과 중국이 싸운 중월전쟁 때에도 중공군이 먹었던 부식이었다.

우리가 중국집에서 무심코 먹는 밑반찬 짜차이에는 이런 역사가 감춰져 있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에 알아본 중국 짜차이 잔혹사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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