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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5일에 다시 읽는 그 시 - 베이다오, ‘회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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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성민엽 문학평론가

성민엽 문학평론가

5월 35일이라는 날짜가 있습니다.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를 군대가 유혈 진압한 사건, 이 사건을 중화권에서는 보통 ‘육사’ 혹은 ‘육사사건’이라고 부르고, 그래서 중국에서는 ‘6월 4일’이라는 날짜와 ‘육사’라는 말이 검열의 대상입니다. 5월 35일은 그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된 가상의 날짜입니다.

그런데 1932년 독일에서 출판된 에리히 캐스트너의 소설 제목이 ‘5월 35일, 혹은 콘라트의 남태평양 여행’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캐스트너는 자신의 사실적인 작풍과는 달리 판타지 풍을 시도했습니다. 주인공인 소년 콘라트가 5월 35일에 판타지 세계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행을 합니다. 이 소설에서 5월 35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신기한 날입니다. 캐스트너의 5월 35일이 부럽습니다.

1989년 천안문 광장서 군중 낭송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 담아
‘반짝이는 별’은 곧 ‘미래인의 눈’
오늘의 우리 질타하고 희망 전해

1989년 5월 천안문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과 시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1989년 5월 천안문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과 시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1989년 당시 천안문의 시위 군중들이 낭송을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시가 있습니다. 베이다오(北島)의 ‘회답’입니다. 시인이 이 시를 쓴 것은 1976년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광장에 모인 학생들과 시민들이 시위를 할 때였습니다. 그렇게 씌어진 시가 13년 후 다시 천안문광장에서 낭송된 것입니다.

이 유명한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이 시를 어떻게 읽을지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 차례 논의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좀 더 간추린 형태로 그 내용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비열은 비열한 자의 통행증,
고상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
보아라, 저 도금한 하늘에,
죽은 자의 굽은 그림자 가득히 나부낀다.”

‘도금한 하늘’이라는 말이 주목됩니다. 하늘의 원래 색이 푸른색인데 지금 하늘은 푸르지 않다, 라고 간단히 읽어버리기에는 시의 중간쯤에 나오는 ‘난 안 믿어 하늘이 푸르다는 걸’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걸립니다. 복잡한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도금이라는 말이 ‘본래 모습을 감추고 가짜 모습을 꾸민다’는 뜻임은 분명합니다.

도금한 하늘, 즉 가짜 색깔이 입혀진 하늘에 ‘죽은 자의 굽은 그림자’가 가득합니다. 몹시 불길하고 무서운 장면입니다.

시의 시간적 배경은 불분명합니다. 낮일 수도 황혼일 수도 있습니다. 도금한 색이 푸른색이라면 낮이겠고(청색 도금도 있음) 노란색이라면 황혼 무렵이겠습니다. 보통은 도금이라고 하면 노란색을 떠올리기가 쉽긴 합니다.

‘도금한 하늘’에 대해 제가 길게 이야기했지만, 이 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시의 첫 부분이 아니라 중간 부분에 나옵니다.

“너에게 말한다, 세계여,
난—안—믿—어!”

중국어로는 ‘워부샹신(我不相信)’ 네 글자인, ‘난 안 믿어’라는 말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 시인이 예언자로서 외치는 판결의 소리입니다. 미래에 나올 판결의 내용을 예언자가 미리 알리는 것입니다.

베이다오

베이다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예언의 시간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시는 다음과 같이 종결됩니다.

“새로운 전기(轉機)와 반짝이는 별들
탁 트인 하늘을 가득히 장식했군,
저것은 오천 년의 상형문자,
저것은 미래인들의 응시하는 눈.”

어느새 밤이 깊어졌고, ‘도금한 하늘’은 ‘탁 트인 하늘’로 바뀌었습니다. 이 ‘탁 트인 하늘’의 색이 하늘의 본래 색인지도 모릅니다. 맑은 날 밤하늘의 색은 무슨 색일까요?

하늘에 가득한 것도 ‘죽은 자의 굽은 그림자’에서 ‘반짝이는 별들’로 바뀌었습니다. 이 별들은 고대 이래의 어떤 비밀을 지닌 상형문자이기도 하고 미래인들이 현재의 ‘나’를 응시하는 눈이기도 합니다. 이 눈은 감시하고 처벌하는 눈이 아니므로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에게 위안을 줍니다.

‘반짝이는 별’=‘미래인의 눈’이라는 등식의 발견이 이 시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별 이미지는 베이다오의 후배 시인들에게 계승되어 다양하게 변주되었습니다.

1976년과 1989년의 밤하늘에서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을 응시하던 미래인들의 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는 금기, 해외에서는 추모라고 요약될 수 있는 상태가 35년이 지난 올해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미래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되어 현재인들을 응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이 미래인들은 중국에만 해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도 똑같이 해당하는 보편적 존재라고. 미래인들의 응시는 우리를 질타하고 격려하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힘을 줍니다.

성민엽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