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무왕 9년(서기 699년)에 당나라 사신이 왔다. 이때는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라 당나라 사신의 태도는 방자했다. 당나라 사신은 신라를 떠나면서 조공품 가운데 신라의 활을 보고 욕심을 냈다. 그 활이 1000보(步)를 날아가는 것을 보더니 아예 그 활을 만든 장인(匠人)을 인신 조공으로 요구했다. 그 장인이 아찬(阿湌) 벼슬의 구진천(仇珍川)이었다. 문무왕은 당나라 사신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당나라에 도착한 구진천은 황제 당 태종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줬다. 황제는 곧 재료를 주면서 구진천이 활을 만들도록 했다. 그런데 그가 만든 활은 3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한 당 태종이 이유를 묻자 구진천은 재료가 나쁘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이에 당 태종은 사람을 신라에 파견해 활 재료를 구해 오도록 했다. 그러나 새로 가져온 재료로 만든 활도 6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당 태종이 다시 그 이유를 묻자 구진천은 이번에는 재료를 배로 운반해 오는 동안 습기가 찼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영악한 당 태종은 구진천이 활을 만드는 비법을 숨기고 있음을 간파했다. 결국 당 태종이 죽이겠다고 협박했으나 구진천은 활을 만드는 비법을 끝내 전하지 않고 죽었다. 그 화살에 자기 동포가 죽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국가의 기밀이란 이토록 중요한 것이며, 자기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또한 이토록 뜨거운 것이다. 지난날에는 하급 기술 관리에게도 고국을 사랑하는 충정이 있었는데,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전문가들은 첨단 기술을 발명해 명성을 얻으면 고국을 떠나는 경우가 있다.
자기의 능력을 펼 길이 없어 떠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그들의 처사가 고국에 누가 되는 경우라면 지탄할 수밖에 없다. 고국이 우리를 버려도 우리는 고국을 버릴 수 없다. 어머니를 버릴 수 없듯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