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판 ‘쇼생크 탈출’…이데올로기는 쏙 뺐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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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영화 ‘탈주’는 탈북하려는 북한군 규남(사진 위, 이제훈)과 그를 쫓는 보위부 현상(사진 아래, 구교환), 두 청년의 숨 가쁜 추격전을 그렸다. [사진 플러스엠]

영화 ‘탈주’는 탈북하려는 북한군 규남(사진 위, 이제훈)과 그를 쫓는 보위부 현상(사진 아래, 구교환), 두 청년의 숨 가쁜 추격전을 그렸다. [사진 플러스엠]

‘고민은 끝났다. 직진한다.’

이종필(44) 감독이 영화 ‘탈주’(7월 3일 개봉)를 준비하며 써본 주인공 규남(이제훈)의 수기의 핵심 문장이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은 “규남이 생고생해서 행복해졌는지는 중요치 않다. 목표를 자기 의지대로 해내는 과정의 쾌감과 가능성, 지금 이 순간 ‘살아있구나’ 느끼는 감각만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탈주’는 상영시간 94분 내내 질주하는 영화다.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북한군 중사 규남은 첫 장면부터 망설임 없는 몸짓으로 탈북을 준비한다. 타이머와 나침반을 손에 쥔 채, 최전방 철책선 너머 지뢰 매설 위치를 파악한 뒤 부대로 돌아오길 반복하는 그의 치밀함은 탈옥 소재 영화 ‘쇼생크 탈출’(1994)을 연상시킨다.

‘탈주’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전국노래자랑’(2013) 등의 연출자이자 배우 출신인 이 감독의 첫 액션 연출작이다. 단편 ‘불을 지펴라’(2007)에서 록 음악을 동경해 탈북한 북한 청년을 그렸던 그가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2022), 영화 ‘공작’(2018)을 쓴 권성희 작가의 각본을 토대로 메가폰을 잡았다.

이종필 감독과 전작을 함께한 배우 이솜(가운데)이 북한 유랑민 리더로 특별 출연했다. [사진 플러스엠]

이종필 감독과 전작을 함께한 배우 이솜(가운데)이 북한 유랑민 리더로 특별 출연했다. [사진 플러스엠]

“귀순 병사의 사연이 아니라 ‘탈주’ 그 자체에 관한 영화”라고 작품을 정의한 그는 “탈주는 기존 질서와 체계를 전복하고 새로움을 끌어내는 일”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규남은 어린 시절 알고 지낸 보위부 소좌 현상(구교환)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 받지만, 탈북 의지를 꺾지 않는다. 현상의 맹렬한 추격을 피해, 그는 오로지 남으로 직진한다.

빠르게 사건을 전개시키는 연출 방식이 도드라진다. 신파적 사연을 기피하는 요즘 관객 취향을 고려한 결과다. 이 감독은 “젊은 친구들이 ‘고뇌는 현실에서 하니까, 영화는 고민 없이 쭉쭉 가는 걸 보고 싶다’더라”면서 “요즘 말로 ‘시간 순삭(순간 삭제)’을 성취해보고자, 연출 개념을 뺄셈으로 잡았다. 규남의 동기나 인과 관계도 최대한 뺐다”고 말했다.

이종필

이종필

기존 북한 소재 영화·드라마가 남북한 역사, 긴장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탈주’에서 남한의 존재감은 규남의 골인 지점 정도다. 이 감독은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이 영화가 매혹적인 악몽 같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소재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냐고 묻자, 이 감독은 연출 제안을 받던 시기 우연히 본 해외뉴스를 언급했다. 아프리카 청년들이 비행기 바퀴에 몸을 묶고 유럽 밀입국을 시도했던 사건이다. 얼마 뒤 만난 그의 친구는 술에 취해 직장을 그만두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 절절한 마음들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그의 가슴을 때렸다고 한다.

영화에선 현상의 사격 실력도, 규남의 도주 능력도 다소 초인적으로 그려진다. 순수하게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활극을 찍고 싶었다는 이 감독은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덴마크산 PC 게임 ‘인사이드’를 꼽았다. “어딘가에 갇힌 자가 아무런 설명 없이 화면 오른쪽 방향으로 탈출하는 게임”이다.

대자연에서 구르고 내달리는 아날로그 액션도 볼거리다. 충주 비내섬부터 화성·광양·여주·남양주·가평·동두천·김제·공주·아산·무등산·인제 등에서 최전방 부대, 비무장지대 장면을 촬영했다.

하이라이트는 규남이 전력 질주하는 후반부 일출 장면이다. ‘러시안암’(주행 장면 촬영용 카메라 장비)을 장착한 포르쉐 차량 속도에 맞춰 이제훈이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규남의 원초적 모습을 위해 이제훈은 ‘생존형’ 근육을 만들었다. 이 감독은 “프로틴을 먹고 키운 ‘자본주의 근육’이 아닌 장작처럼 마른 근육 몸매”라고 평했다. 이제훈은 진흙탕 늪(실제론 미숫가루로 만들었다)에 빠지는 장면도 직접 소화했다.

입술에 립글로스를 바르며 도도하게 등장하는 현상은 사상성이 투철한 북한군 장교와는 거리가 먼 캐릭터다. 이 감독은 현상 캐릭터에 “전형성을 탈피한 언밸런스한 리듬감”을 심었다. 러시아 유학까지 다녀온 피아니스트지만, 군 장성 집안에 장가간 후 군인 신분이 된 현상의 뒤틀린 운명처럼 말이다.

남으로 향한 규남이 행복해졌을까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이 감독은 “젊은 세대의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에 공감하지만, 그래도 뭔가 자기 의지로 해본 사람은 다르지 않을까. 보는 분들이 각자의 결말을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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