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 6월 수상작] 손땀 묻은 연장통처럼 오랜 습작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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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아버지와 연장통
이정순

아버지 연장 통엔 세월이 담겨있다
묵 향을 묻힌 채로 집에 오는 날이면
바다도 딸려왔는지 미역 냄새 물씬 난다

올곧게 줄을 세워 검은 먹줄 튕기면
목갑판에 선을 긋듯 손등에 푸른 힘줄
매 순간 최선이라며 다듬어 가는 손 길

바람에 밀려가는 달빛을 등불 삼아
밥 술 위한 객지 생활 등짐 진 무게만큼
나룻배 밥*치는 소리 꿈 키우는 망치질

*나무 판자와 판자 사이에 물막이를 채우는 일

◆이정순

예원여자고등학교 졸업, 현재 도장공으로 근무중

차상

바둑 한 판 하실래요
김보선

어깨를 맞대고서 바닥을 넓혀가는 집
잘잘못 교차할 때 바둑 한판 하실래요
제각각 생각이 달라 크기를 견줘본다

한집씩 채워 가면 새 현장 생겨날지
모서리마다 난간인 하청업체 아버지
칸칸이 세워놓아도 또 다른 길 막혀있다

헛디뎌 늦춰지는 촉박한 공사일정
손발을 맞춘 시간 땀방울 착점할 때
조용히 수를 읽어내 집집을 늘려간다

차하

컵에도 귀가 있다
박하영

마음속에 차올라 찰랑이는 얼굴은
서로를 확인하다 넘치고 쏟아진다
표정은 축축한 채로 제멋대로 흐른다

어디든 바로 앉아 손의 음성 느낄 때
입술을 엿듣는 험담의 소란까지
맞잡은 한 개의 귀가 들어주고 담아낸다

뜨겁고 차가운 건 참아내기 쉬운 기억
촉감이 부드러워 맑은소리 삼키면
다 비운 그 속의 말들 조용히 엎어놓는다

이달의 심사평

이번 달 장원에는 이정순의 ‘아버지와 연장통’을 골랐다. 어려운 시어나 특별한 기교없이 작품을 끌고 가는 능력을 높이 샀다. “바다도 딸려왔는지 미역 냄새 물씬 난다”거나 “바람에 밀려가는 달빛을 등불 삼아” 등의 비유도 “묵 향” 나듯이 신선했으며 셋째 수 종장에서 아버지의 스산한 노동을 “꿈 키우는 망치질”로 마무리 한 것은 시조를 오랫동안 습작해 오신 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차상에는 김보선의 ‘바둑 한 판 하실래요’를 선정했다. 같이 보내온 작품 ‘하이힐의 표정’을 당선작으로 해도 무방했음을 알린다. 두 편 모두 시조의 정형율에 잘 들어맞는 작품이긴 하나 정형성에 너무 천착하다 보면 전체적인 흐름이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작품을 끌고 가는 힘이 돋보였고 시적 완성도가 높은 두 편의 작품을 보며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를 걸어볼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차하는 박하영의 ‘컵에도 귀가 있다’로 정했다. 컵을 앞에 놓고 서로 대화를 하면서 손의 감정과 음성을 컵과 같이 느끼며, 찰랑이는 마음을 나누는 카페의 정경을 차분하고 세심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컵의 귀가 들어주고 위로한다는 발상이 참신하다.

그 외 박민숙의 ‘비너스60AA’, 전미숙의 ‘분홍 탈의실’, 전형우의 ‘따개비의 출근’도 숙고했다.

심사위원 손영희(대표집필)·이태순

초대시조

무량사 가는 길
윤채영

늦가을 비 내리는 무량사 초입쯤
바람길 묻고 있는 수척한 단풍 한 잎
풍경이
몇 번 웁니다
적막이 잠을 깹니다

가던 길 멈추고 귀 잠시 세웁니다
열반에 들지 못한 늙은 선사 젖은 독경
이 저녁
단풍 듭니다
발끝을 적십니다

◆윤채영

2003년 ‘열린시학’ 등단, 시조집 『걸음을 멈춘지가 오래 되었다』 현대시조100인선 『참매는 자유다』

‘무량사 가는 길’에는 연두의 봄, 초록의 여름을 다 보내고 소멸로 가는 적막한 가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수의 짧은 형식 안에 수사를 모두 잘라내어 완성한 여백이 넓은 가편이다. 바람이 툭 칠 때마다 댕그렁 풍경이 우는 인적 없는 암자의 흰 적막이 잡힐 듯 그려진다. 나는 청소년기에 지도를 펼쳐 놓고 깊은 산에 숨은 듯 자리한 卍자를 손 끝으로 더듬으며 잿빛 승복을 동경한 적 있다. 삶에 대해 회의가 깊었으며 혼돈 속에 머물던 시간이 제법 길었다.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마음 깊은 곳엔 여전히 나만의 암자가 한 채 있다. 무량사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는 절일까, 어린 시절 지도를 펼쳐보듯 검색창을 두드린다. 그리고 다시 시조를 감상한다.

‘늦가을 비 내리는 무량사 초입쯤
바람길 묻고 있는 수척한 단풍 한 잎
풍경이
몇 번 웁니다
적막이 잠을 깹니다.’

눈앞에 그린 듯 적요한 풍경이다. 시인은 늦가을 비 내리는 무량사 초입에서 생을 다 살아내고 ‘바람길을 묻고 있는 수척한 단풍 한 잎’을 마음에 담았나 보다. 그리고 가던 길 멈추고 귀를 잠시 세운다. ‘열반에 들지 못한 늙은 선사 젖은 독경’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 둘째 수 종장에서 화자는 고백 아닌 고백을 한다.

‘이 저녁
단풍 듭니다
발끝을 적십니다’

정혜숙 시조시인

◆응모안내

다음달 응모작은 7월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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