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집주소 당장 대라” 출판사 기습한 공수부대 3인

  • 카드 발행 일시2024.06.24

13. 내 소설이 겪은 검열 수난 

1979년 내 등단작 ‘새하곡(塞下曲)’은 한동안 읽을래야 읽을 수 없는 소설이었다. 출세작 『사람의 아들』 안에 끼워져 그해 6월 일찌감치 세상에 나왔지만, 오래 못 가 소설책에서 슬그머니 빠져버린 후 아무 데도 재수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새하곡’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된 건 5공화국이 저물던 87년 말 비로소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소설집 『구로(九老)아리랑』에 실리면서다. 나는 그때 ‘새하곡’의 맨 마지막에 ‘작자부기(作者附記)’라는 이채로운 항목을 덧붙였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군대는 최소한 15년 전의 군대다. 다소간 부정적인 묘사가 있더라도 이 글의 목적이 처음부터 고발이나 폭로에 있지 않았거니와 이제는 모든 것이 개선된 줄로 안다.

1987년 말 출간된 소설집 『구로아리랑』에 수록된 중편 '새하곡'의 마지막 페이지. '작가부기'가 붙어 있다.

1987년 말 출간된 소설집 『구로아리랑』에 수록된 중편 '새하곡'의 마지막 페이지. '작가부기'가 붙어 있다.

소설 발표 직후처럼 말썽이 나지는 않겠지만 불필요한 시비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새하곡’은 80년대 검열 당국에 의해 ‘금서’로 낙인찍힌 소설이었다. 내 소설 중 ‘새하곡’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도 당시 다른 작가들처럼 보이게, 보이지 않게 많이 터졌다. 심심치 않게 여러 작품이 문제가 됐다. 지금이야 이렇게 담담하게 밝히지만 잇따라 당국이 내 작품 내용을 문제 삼았던 80년대 초반에는 달랐다.

참으로 나쁜 때에 글쓰기를 시작했구나. 어쩌면 이제 막 벗어난 것 같은 연좌제보다 더한, 새로운 감시와 처벌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강박에 억눌릴 때면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사실 ‘새하곡’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부터 걱정되긴 했다. 지난번에 밝힌 것처럼 글이 그렇게 술술 풀린 건 난생처음이었다. 20여 일 만에 완성한 원고지 280쪽 분량의 중편소설을 당시로는 흔치 않던 정서(整書) 방법인 ‘공타’ 인쇄를 하기 위해 작은형님이 경영하던 인쇄소에 넘기기 전 마지막으로 검토하던 중에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등단작 ‘새하곡’ 검열 걸려 7년간 ‘금서’

내 소설 독자들은 기억하겠지만, ‘새하곡’은 3박 4일간의 전방부대 모의 전투 훈련이 배경이다. ROTC 출신 통신과장 이 중위는 또래보다 군 입대가 늦은 강 병장 등의 모든 것을 방기한 채 나태와 탐락만을 추구하는 듯한 자세를 추궁한 끝에 강 병장의 입을 통해 이런 답을 듣는다.

니힐이죠. 병사의 절망입니다.

모든 병사는 군번과 함께 ‘병사의 절망’을 잠재의식 속에 지급받는다. 모든 것을 타아(他我)에게 맡겨버린 자아의 절망. 사람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생명까지도 자기 것으로 가지지 못한 병사의 철저한 무(無). 소설 속 강 병장처럼 입대가 늦었던 나는 내가 경험한 군대에서의 절망을 소설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설을 응모하던 78년 말은 유신 체제의 말기, 군사문화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군대에 부정적이거나 비우호적인 이야기가 과연 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까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결국 5공화국 내내 소설책으로 묶일 수 없었으니 괜한 기우(杞憂)였던 것만도 아니었다.

1980년 4월 『사람의 아들』 10판 속표지. 중편 '사람의 아들'과 중편 '새하곡'의 제목이 인쇄돼 있다.

1980년 4월 『사람의 아들』 10판 판권 페이지. '1980년 4월 30일' 날짜가 찍혀 있다.
1981년 1월 판본 『사람의 아들』의 속표지. '새하곡'이 빠져 있다.
1981년 1월 판본 『사람의 아들』에는 '새하곡' 대신 '제쳐논 노래' 등 단편 세 편이 대신 들어갔다.
'1981년 1월 30일' 날짜가 찍힌 『사람의 아들』 판권 페이지.

‘새하곡’이 언제 초판 『사람의 아들』에서 빠졌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80년 4월 30일 발행된 ‘10판’ 『사람의 아들』에는 들어 있었다. 이듬해 1월 30일 발행된 판본에는 중편 ‘새하곡’ 대신 단편 세 편, ‘제쳐논 노래’ ‘달팽이의 외출’과 ‘이 황량한 역에서’가 들어 있다. 두 판본의 사이 언제쯤 당국의 개입이 있었을 텐데, 80년 하반기라면 서울시청에 자리 잡은 계엄사 합수부 심의실에서 간행물의 출생신고서에 해당하는 납본 필증을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심기를 거스르는 책들의 출간을 불허하거나 출간 통제를 하던 시기다.

‘새하곡’의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됐는지는 한참 후에야 들을 수 있었다. 군 보안사에서 나왔다고만 신분을 밝힌 내 담당은 문제가 생기면 주로 신라호텔 커피숍으로 나를 불러냈다. 5공화국 후반이었던 것 같다. 나도 나름 유명해졌을 때다. 소설 중간중간에 불온한 대목이 있는 데다 군 기밀이 함부로 다뤄지는 것처럼 소설에서 그려져 문제였다는 얘기를, 그런 점들을 문제 삼는 자기네에게도 고충은 있다는 식의 얘기까지 곁들여 들려줬다. 불온한 대목이란 하극상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진 장교와 사병 간 훈련 중 갈등, 기밀과 관련된 문제는 고위층이 탑승한 비행기의 이륙 시간을 통신병들이 보안성이 떨어지는 초급 음어로 주고받다 처벌되는 상황이 드물지 않은 것처럼 소설에서 묘사된 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필론의 돼지’로 공수부대, 출판사 들이닥쳐  

80년에 발표한 단편 ‘필론의 돼지’는 온 가족을 일주일가량 피신하게 만든 작품이다. 그해 5월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전속 계약은 없었지만 전속이나 다름없었던 민음사의 노련한 여성 편집자가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조금 전에 민음사 사무실로 검은 베레모를 쓴 공수부대원들이 찾아와 내 주소를 알아갔으니 가족과 함께 며칠간 도피했다가 돌아오는 게 좋겠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