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머물수록 좋다…가성비에 대만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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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0년째 신혼여행⑭ 타이베이

300년 역사의 용산사.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불교의 관세음보살 외에 도교의 마조 등 100여 신을 모시고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300년 역사의 용산사.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불교의 관세음보살 외에 도교의 마조 등 100여 신을 모시고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평생 해외의 100개 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자. 10여 년 전 해외 한 달 살기를 시작하며 세웠던 목표다. 벌써 48개 도시를 채웠으니 예순 전에는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일상을 여행처럼 산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팔자 좋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늘 좋은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만 타이베이에서 보낸 한 달은 특히 불행에 가까웠다.

아내의 여행

중앙의 초고층 건물이 타이베이의 랜드마크 ‘타이베이 101’이다. 샹산 정상에서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중앙의 초고층 건물이 타이베이의 랜드마크 ‘타이베이 101’이다. 샹산 정상에서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2015년 4월 타이베이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 여행 내내 나는 우울했고,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2년에 걸친 세계 일주의 마지막 도시가 타이베이였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직업도, 집도, 돈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전세금을 탈탈 털어 무작정 세계 일주에 나섰던 어느 부부의 결말이구나 싶었다.

대나무 모양의 8단 구조로 돼 있는 타이베이 101.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대나무 모양의 8단 구조로 돼 있는 타이베이 101.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통장 잔고는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내 걱정도 모르고 종민은 천하태평, 날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나를 졸랐다. 마침 숙소 1층에 새벽부터 부지런히 만두를 빚는 식당이 있었다. 평소 만두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지만, 타이베이에서 이 편견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그 뜨겁고 느끼한 만두소와 육즙에 내 미각은 어느새 중독되고 말았다. 나는 만둣집으로 날마다 오픈런을 했다. 얇은 피 안에 육즙을 가득 품은 이것이 샤오룽바오라는 것을 알려준 이는 종민이었다. 매일 고통의 연속이었고 궁핍했지만, 샤오룽바오만은 끊지 못했다. 샤오룽바오를 먹을 때만큼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시나마 잊었던 거 같다.

타이베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통하는 시먼딩. 서울의 명동과 홍대 앞 거리를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분위기다.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타이베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통하는 시먼딩. 서울의 명동과 홍대 앞 거리를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분위기다.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대만에서도 우리는 글을 썼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대만 출판사 여러 곳을 수소문해 원고를 보냈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낡은 노포를 찾아다니며 배를 채웠다. 타이베이에는 30년 이상 같은 자리에서 대를 이어온 식당이 많았다. 장사가 잘되면 분점을 내거나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이기 마련일 텐데, 그렇지 않은 식당이 더 많이 보였다. 한번은 그 이유를 주인장에게 물으니 “규모를 키우는 것보다 같은 자리에서 단골을 맞이하고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타이베이의 노포에는 그만의 소박한 맛과 멋이 묻어 있었다. 타이베이에 머물며 신세 한탄을 달고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눈앞에 주어진 행복을 바라보는 법을 뼈저리게 배운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의 여행

타이베이의 노점 식당 거리.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야 더 활기를 띠는 장소다.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타이베이의 노점 식당 거리.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야 더 활기를 띠는 장소다.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풍족하고 행복한 추억은 없지만, 그 뒤로도 우리는 여러 차례 대만을 찾았다. 대만을 갈 때마다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라는 속담을 자주 떠올린다. 대개의 한국 여행자는 짧은 여행으로만 대만을 즐기는데,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타이베이·가오슝·타이난·타이중까지 대만의 4개 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해 본 결과, 대만은 장기간 여행에서 더 빛을 발하는 여행지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육즙 가득한 샤오룽바오.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먹거리다.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육즙 가득한 샤오룽바오.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먹거리다. [사진 대만교통부관광서]

일단 생활비가 저렴하다. 물가는 서울의 약 3분의 2 수준이다. 다른 동남아 국가에 비하면 방값이 높은 편이다. 우리는 동남아에서 한 달 살기를 할 때 한 달 방값 예산으로 대략 500달러를 잡는다. 70만원이 안 되는 돈이지만 수영장과 헬스장이 딸린 숙소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이베이에서 500달러로 구할 수 있는 숙소는 시외의 오래된 주택 정도다. 그래도 월 5만원이면 최신식 기구를 갖춘 헬스장을 등록할 수 있으니, 가성비가 꽤 높은 도시라 할 수 있다. 따뜻한 남쪽 나라라서 망고·파파야 등의 열대과일도 넘쳐난다. 11~2월에 가면 우리네 가을처럼 선선한 날씨를 누릴 수 있다.

한국과 가까운 거리도 장점이다. 한 달 동안 한국의 일상과 완전히 분리돼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가까운 지인의 경조사를 챙겨야 할 수도 있고, 집 보일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갑자기 한국에 가야 할 때 가까운 거리는 꽤 중요한 가치가 된다. 인천에서 대만까지는 불과 2시간 30분 거리다. KTX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시간과 비슷하다. 항공편도 많고, 편도 10만원 이하의 항공권도 수시로 올라온다. 대중교통, 병원 등 인프라도 훌륭하다. 해외에 나가면 한국만큼 치안이 좋은 나라도 없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카페에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놓고 화장실에 가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은 한국, 일본 그리고 대만 정도라고 생각한다.

‘도전에는 대가가 따른다’고들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으니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무모한 도전 덕분에 남다른 시야를 얻었다. 이쯤 되면 대가가 아니라 보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타이베이 한 달 살기 정보=·비행시간: 약 2시간 30분 ·날씨: 10월~4월 추천. 11~2월은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하다. ·언어: 중국어, 대만어 ·물가: 서울의 3분의 2 수준 ·숙소: 600달러 이상(시내 외곽, 집 전체)

김은덕 백종민

김은덕 백종민

글·사진=김은덕·백종민 여행작가 think-thin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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