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십시오, 12만 장병들 … 25년 걸친 귀환작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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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호 28면

‘호국보훈의 달’ 이근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

이근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이 지난 13일 국립서울현충원 내에 위치한 중앙감식실에서 6·25전쟁 전사자 발굴 유해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김상선 기자

이근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이 지난 13일 국립서울현충원 내에 위치한 중앙감식실에서 6·25전쟁 전사자 발굴 유해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김상선 기자

오빠가 돌아왔다.

언제라도 불쑥 찾아올까 봐, 충남 홍성군 장곡면 생가는 그대로 놔뒀다. 6·25전쟁에 참전한 오빠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스무 살. 오빠의 나이는 그렇게 박제돼 버렸다. 여동생은 몰랐다. 오빠가 강원도 양구군 수리봉 ‘피의 능선 전투(1951년 8월 18일~9월 5일)’에서 포탄에 산산이 부서진 줄은.

유골 한 점, 한 점이 모였다. 어떤 유골은 22m 떨어져 있기도 했다. 이름 없는 유골은 결국 제5보병사단 36연대 고 류홍석(1931년생) 일병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오빠가 돌아왔다. 이근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은 류 일병의 유품이 담긴 ‘호국의 얼’ 함을 류영순씨에게 건넸다. 오빠가 ‘귀염둥이’라고 부르던 여동생은 어느새 85세가 됐다. 이 단장은 “가족의 품에 돌아오는 6·25 미수습 전사자는 2%뿐”이라며 “국가를 위해 산화한 이들을 찾아주는 건 국가의 기본 의무”라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1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이 단장을 만나봤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2007년 출범

2%라면 아주 적군요.
“6·25는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병적 기록이 부실했습니다. 미군의 경우 진료 기록과 치아 상태, 신체적 특징 등을 보관해 둬서 유전자 분석 없이도 유해 신원 확인이 가능합니다. 반면 우리는 그런 자료가 거의 전무해 유전자 분석이 유일한 신원 확인 방법입니다.”
70년 이상 지났는데 분석이 가능합니까.
“어느 정도 단단하게 남아 있는 유골은 가능합니다. 역설적으로 유전자 분석이 유일한 신원 확인 방법이다 보니 미국에서 의뢰할 정도로 우리 기술이 월등합니다. 다만 신원을 확인하려면 유가족의 유전자 시료가 확보돼야 하는데 그게 부족한 실정입니다. 류 일병의 경우 2011년 유해 발굴 후 13년 만에야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2022년 3월 여동생의 유전자 시료를 채취한 결과였죠.”
한국전쟁 국군 희생자 수

한국전쟁 국군 희생자 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2007년 출범했다. 2000년 6·25 발발 50주년 사업으로 육군에서 처음 시작했다가 국방부 산하에 전속 기구를 두게 됐다. 전쟁 당시 국군 사망·실종자는 16만2394명. 이 중 현충원 등에 안장된 이는 2만9202명뿐이다. 2000년 이후 발굴된 유해는 1만1471구. 하지만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는 233명에 불과하다.

아직도 12만1721명이 대한민국 산하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거군요.
“맞습니다. 남측에 8만여 명, 북측에 3만여 명, 그리고 비무장지대(DMZ)에 1만여 명이 계신 것으로 추정합니다.”
유해 발굴 자체가 쉽지 않을 텐데요.
“당장 전사자와 전투 관련 기록이 크게 부족합니다. 전쟁 세대의 고령화와 사망으로 정보는 더 사라지고 있고요. 경제 발전에 따른 국토 개발로 전투 지역도 변형되거나 훼손됐습니다. 고지전이 유난히 많았던 것도 힘든 이유 중 하나고요.”

중공군의 2차 춘계 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1951년 5월 전선은 교착됐다. 이때부터 고지전이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류 일병이 전사한 피의 능선 전투도 고지전이었다. 이 단장은 “작전 도로에서 발굴 지역으로 진입하는 데만 1~2시간이 걸리는 곳이 적잖다”고 전했다.

발굴 후 신원 확인도 쉽지 않다. 2003년 5월 강원도 횡성군 압곡리에서 발견된 고 오용순(1931년생) 일병의 유해도 지난 3월에야 신원이 확인됐다.

신원 확인에 무려 21년이 걸렸습니다.
“유해 상태가 매우 안 좋았습니다. 유골이 흩어지지 않고 한 구로 발견되는 경우는 10%에 불과합니다. 당시 유전자 분석 기술로는 오 일병과 유가족과의 관련성을 밝힐 수 없었어요. 그러다 올해 2월 보다 정밀한 기술로 분석을 다시 했고, 그렇게 오 일병이 돌아왔습니다.”
유전자 감식 기법의 진화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에 비해 시간이 너무 빨리 가고 있습니다.”
시간이라니요.
“유전자 감식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전사하신 분들과 가까운 촌수여야 합니다. 류 일병과 오 일병의 경우만 보더라도 2촌 관계인 여동생과 남동생의 유전자 시료 제공이 있었습니다. 찾아야 할 전사자(미수습 전사자)들이 12만여 명인데, 지난 2월에야 유가족 6만6673명의 시료 채취에 성공했습니다. 이제 절반을 조금 넘었네요. 여전히 나머지 절반에 가까운 유가족의 시료를 채취해야 하는데, 이분들이 갈수록 고령화하니 시간이 촉박하다는 얘기죠.”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6·25전쟁 전사자 발굴 유해 합동 봉안식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영현병들이 태극기로 감싼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6·25전쟁 전사자 발굴 유해 합동 봉안식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영현병들이 태극기로 감싼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중앙포토]

신원 확인을 위해서는 DNA의 특정 유전자 부위를 비교해야 한다. STR(Short Tandem Repeat·짧은 반복 서열)을 이용한 방법이 지난 20여 년간 쓰여 왔고 최근엔 SNP(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단일 염기 다형성) 방법이 널리 쓰인다. 길이가 긴 STR은 훼손된 실종자의 유전자에서 제 역할을 못할 가능성이 큰 반면 SNP는 짧은 단편 조각이라 식별력이 뛰어나다. 이 때문에 STR은 3촌이나 4촌까지, SNP는 6촌까지 가족 관계를 증명할 수 있다. 이 단장은 “비용이 훨씬 더 들지만 SNP 검사를 확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시료 제공을 위해 스스로 찾아오는 유가족도 계십니까.
“그런 경우는 드뭅니다. 90%는 저희가 직접 갑니다. 7개 팀 35명이 전사자 명부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의 행정복지센터를 거쳐 유가족분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유가족 대부분은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정말 확인할 수 있는 거냐’고 묻습니다.”
국유단에선 어떻게 대응하나요.
“저희도 팩트로 말합니다. 류 일병과 오 일병 같은 사례를 들죠. 그리고 팀원들에게 유니폼을 꼭 입으라고 합니다. 유가족들에게 신뢰감을 줘야 하니까요.”
팩트와 신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유전자 시료를 제공하면 약소하나마 사례금을 드립니다. 유해 신원 확인이 되면 포상금 1000만원도 드리고요. 그런데 입금하려고 통장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면 그때부터 멈칫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통장 번호를 알려주면 개인 정보가 드러난다는 거죠. 동네 이장님과 경찰까지 대동하고 자녀분께 전화해 ‘국가에서 하는 사업으로, 개인 정보는 꼭 보호한다’고 안심시켜 드려도 거부하시는 분들이 적잖습니다. 안타깝죠.”

삼형제 참전용사가 있었다. 전병철씨는 ‘드물게도’ 국유단을 찾아와 유전자를 제공했다. 2011년 6월이었다. 전씨는 3년 뒤 고령(85세)으로 사망해 이천호국원에 안장됐다. 다시 9년 뒤인 2023년 그의 형 전병섭(1925년생) 하사의 신원이 확인됐다. 막내 전병화 이등상사는 6·25 당시 전사해 이미 국립현충원에서 영면 중이었다. 유가족은 “삼형제 모두 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겠느냐”고 국유단에 문의했다. 이 단장은 “심정적으론 당연히 그렇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법적으론 그렇게 못해 드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안타깝고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지난달부터 미국과 합동으로 발굴 나서

현재 미국과 합동으로 유해 발굴 중이죠.
“지난달부터 경북 문경에서 진행 중입니다. 정확히는 유해가 아니라 잔해입니다. 당시 추락한 미군 F-51 전투기의 고유번호를 찾는 겁니다. 지난해 수습한 유해의 신원 확인을 위한 작업입니다. 오는 18일엔 유엔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데릭 매콜리 캐나다 육군 중장과 함께 현지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남북관계 영향도 있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최전방 백마고지 유해 발굴은 중단한 상태입니다.”

지금도 국유단과 일선 부대의 누군가는 가파른 고지에서 유골 한 점, 한 점을 수습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 한 점, 한 점을 정밀 감식하고 또 누군가는 1년 내내 유가족을 찾아다니며 유전자를 채취하고 있다. 그렇게 아빠는 돌아왔다. 2001년 강원도 춘천 사북면에서 찾은 최봉근(1920년생) 일병의 유해는 미군 전사자인 줄 알고 하와이까지 건너갔다 되돌아왔다. 딸은 오빠도 일찍 잃고 사찰에서 홀로 자랐다. 아버지의 신원 확인이 된 지난해 1월 딸은 “정말 오래 기다렸다”며 감격스러워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이 단장도 다시금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국가의 기본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한순간도 멈출 수 없습니다. 아직도 끝까지 찾아야 할 12만1721명이 우리 곁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시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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