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 그늘 아래 인종을 전시하고 여성을 혐오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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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호 22면

올림픽, 전설의 순간들  ② 1900년 파리 올림픽, 지상 최대의 난장

프랑스 화가 막심 모프라가 그린 1900년 파리세계박람회 야간축제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프랑스 화가 막심 모프라가 그린 1900년 파리세계박람회 야간축제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파리는 강과 다리의 도시다. 센 강이 파리를 상징하는 힘은 로마의 테베레 강이나 피렌체의 아르노 강을 압도한다. 강은 파리의 일부가 되어 제 흐름을 지킨다. 그리고 다리들이 그 위에 엎드려 인간의 걸음에 등을 맡긴다. 삶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센 강도 다리들도 개입하지 않는다. 희극일 땐 희극의 일부가 되고 비극일 땐 비극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수많은 소설과 영화가 센 강에 걸린 다리 위에서 시작되거나 끝난다.

소설 『개선문』의 주인공 라비크는 알마 다리에서 조앙 마두를 만난다.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주인공들은 비라켕 다리에서 처음 만난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에서 시작하는 새 사랑의 예고로 막을 내린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노숙하는 남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여인의 사랑을 그렸다. 아폴리네르는 노래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미라보 다리’)

하지만 당신이 파리를 떠날 때, 냉장고에 붙일 마그네틱을 구입한다면 거기엔 강물도 다리도 없을지 모른다. 우리는 추억을 기념하지 않으니까. 아마도 당신은 에펠탑이 들어간 그림엽서와 열쇠고리를 선택할 것이다. 수전 스튜어트는 『갈망에 대하여』에서 기념품을 ‘노스탤지어, 즉 기원을 향한 갈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물’로 규정한다. 그가 보기에 에펠탑 모형 같은 기념품은 “노스탤지어라는 충족될 길 없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물건”이다.

에펠탑은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했다. 그의 작품은 파리 시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소설가 기 드 모파상도 에펠탑을 혐오했다. 그는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 탑의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악마의 표식이라던 이 흉물은 파리 풍경의 디폴트였고, 결국은 아이콘이 되었다. 이런 현상을 ‘에펠탑 효과’라고 한다.

24개국 997명 참가 5개월 동안 경기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서 여성 첫 금메달리스트가 된 테니스 선수 샬럿 쿠퍼. [사진 위키피디아]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서 여성 첫 금메달리스트가 된 테니스 선수 샬럿 쿠퍼. [사진 위키피디아]

파리는 1899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에펠탑을 세웠다. 파리는 1855년부터 1937년 사이에 모두 8차례 박람회를 연다. 에펠탑이 기념한 박람회는 4번째다. ‘벨 에포크’의 한복판, 광대한 해외 식민지를 보유한 프랑스의 전성기다. 제국주의·오리엔탈리즘·인종차별이 박람회를 지배했다. 파리는 에펠탑 가까운 곳에 흑인과 카나크 족의 마을을 지었다. 흑인 마을엔 세네갈과 가봉 출신 아프리카인, 카나크 족의 마을엔 뉴헤브리디스 제도 등 남태평양 식민지의 주민을 전시했다. 1900년 박람회에도 ‘인간 동물원(Human Zoo)’은 빠지지 않았다. 남미, 아시아의 인종, 풍물관까지 등장한다.

파리박람회의 유산은 우리에게도 상흔을 남긴다. 유럽의 문물이라면 뭐든 흉내 낸 제국주의 일본은 1907년 3월 20일부터 7월 31일까지 도쿄에서 박람회를 열었다. 이때 ‘학술인류관’이라는 공간에 조선인을 전시했다. 4년 전 오사카 박람회에서 조선 여성 두 명을 구경거리로 내돌린 일본은 이번에도 상투를 튼 남성과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을 전시했다. 조선은 분개했다. “예전에 우리가 아프리카 토인종을 불쌍히 여겼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어찌 그들이 우리를 더욱 불쌍히 여기게 될 줄 알았으리오.”(대한매일신보 1907년 6월 21일자)

1900년 파리 올림픽은 5개월 동안 경기가 열렸다. 육상 1500m 결승선에 도착하는 선수들. [사진 위키피디아]

1900년 파리 올림픽은 5개월 동안 경기가 열렸다. 육상 1500m 결승선에 도착하는 선수들. [사진 위키피디아]

파리 올림픽은 파리가 주최한 5번째 박람회의 여러 행사 가운데 하나다. 벨로드롬 드 뱅센을 주경기장 삼아 24개국 선수 997명이 참가해 19개 종목 95개 경기를 했다. 대회 기간은 5개월이 넘었다.(1900년 5월 14일~10월 28일) 난장 같은 이 행사가 올림픽임을 아는 시민은 거의 없었다. 올림픽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대회 운영권을 만국박람회 조직위원회에 넘겼다. 만국박람회 공식보고서는 ‘국제 체육 및 스포츠 대회’라고 기록했다. 피에르 쿠베르탱은 “올림픽이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처량한 고백이다.

파리 올림픽은 종목에 따라 경기력 차이가 컸다. 10개국 이상 참가한 종목은 육상·수영·펜싱 뿐이었다. 대학 선수가 주축을 이룬 미국의 육상은 강했다. 테니스엔 윔블던 챔피언들이 참가했다. 수영과 펜싱의 경기 수준도 높았다. 나머지 종목의 경기력은 낮았다. 축구가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고, 줄다리기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줄다리기도 당시 정식종목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줄다리기도 당시 정식종목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 대회의 수퍼스타는 육상 4관왕 앨빈 크렌즐린(미국)이다. 크렌즐린은 60m(1904년 올림픽부터 제외)와 110m 허들, 200m 허들, 멀리뛰기에서 우승했다. 그의 위업은 1936년 제시 오언스(미국)가 재현한다. 오언스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100m, 200m, 400m계주, 멀리뛰기 등 4종목 금메달을 따냈다.

파리 올림픽은 여성이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다. 4년 전 아테네 대회에는 여성 참가자가 없었다. 영국의 샬럿 쿠퍼는 1900년 7월 11일에 열린 테니스 여자단식 결승에서 프랑스의 이본 프리보를 2-0(6-1, 6-4)으로 물리쳤다. 올림픽 역사상 첫 여성 챔피언의 탄생이다. 쿠퍼는 혼합복식에서도 우승, 최초의 여성 2관왕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윔블던에서 다섯 번 우승한 쿠퍼는 당시 여성 선수로는 드물게 오버헤드 서비스를 구사했고, 공격적인 경기를 했다.

쿠퍼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히로인 슈테피 그라프를 연상시킨다. 그라프는 그랜드 슬램 대회(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US 오픈)와 올림픽을 모두 제패해 ‘골든 슬램’을 달성했다. 쿠퍼가 놀라운 점은 26살 때 청력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쿠퍼는 첫 우승을 빼고는 모두 청각에 의지하지 않고 우승했다. 상대 선수의 샷을 읽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을 포기한 채.’

말을 타고 경기를 벌이는 폴로 종목. [사진 위키피디아]

말을 타고 경기를 벌이는 폴로 종목. [사진 위키피디아]

쿠퍼의 우승을 쿠베르탱은 어떤 기분으로 지켜보았을까. 쿠베르탱은 여성의 올림픽 참가를 반대했다. 그에게 스포츠는 남성의 일이었다. 여성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열등한 인종이었다. 쿠베르탱은 1912년에 발표한 ‘올림픽 경기에서의 여성들’에서 여성의 참여를 ‘터무니없다’고 표현했다.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이 열렸을 때는 여성을 올림픽에서 영원히 추방하자고 제안했다. 1925년 프라하에서 개최된 올림픽 총회의 개막 연설에서는 “여성의 올림픽 참가는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1931년에도 여성이 스포츠에 참여할 권리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한 쿠베르탱은 1934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근대올림픽 40주년 기념식에서 한 술 더 떴다. “여성 운동선수를 가까이 하는 것은 남성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1935년 라디오 스위스 방송에 출연해서는 “올림픽에서 여성이 할 일은 남성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여성은 승리자를 위한 전리품에 불과했다.

쿠베르탱, 고대 남성들의 제전 부활 꿈

쿠베르탱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했든, 여성은 올림픽의 주인공이 되었다. 여성 선수가 한 명도 없었던 아테네 대회와 달리 파리 올림픽에는 22명이 참가했다. 24년 뒤 파리가 다시 한 번 올림픽을 주최할 때는 처음으로 100명을 넘었다(135명).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는 4069명, 가장 최근인 2020년 도쿄 올림픽에는 5457명이 참가하였다. 지금까지 여성 올림픽 참가자 수가 남성보다 많았던 적은 없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쿠베르탱은 왜 여성의 올림픽 참가를 반대했을까.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에 심취한 결과라는 주장이 있다. 고대 올림픽은 남성들의 제전이었다. 쿠베르탱은 올림픽의 영구 개최를 원하는 그리스의 뜻을 꺾고 개최권을 파리로 가져갔다. 그는 파리에 올림피아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그리스의 유적지에 흩어진 조각 작품과 경기 시설을 파리에 복원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파리박람회를 총괄한 알프레드 피카르는 생각이 달랐다. 시대의 첨단을 걷는 세계적인 전시회에서 옛 스포츠 대회를 개최할 수는 없었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우스꽝스러운 짓이었다. 그래서 쿠베르탱의 주장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쿠베르탱의 꿈은 36년 뒤 베를린에서 조금 다른 모습으로 현실이 된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스포츠 기자로 30여 년간 경기장 안팎을 누볐으며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지냈다.  2023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2019년부터 한체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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