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층보다 노련, 모바일도 능숙"…'파워 시니어' 퇴직은 없다 [고령근로 빛과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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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2023년 10월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3 대한민국 노인일자리 박람회에서 시민들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23년 10월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3 대한민국 노인일자리 박람회에서 시민들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 임성택(61)씨는 KT에서 36년간 방송 회선 유지 보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88년 공채로 입사해 2022년 정년퇴직을 했지만, 시니어 컨설턴트 제도를 통해 재입사했다. 2018년 도입된 이 제도는 정년퇴직 예정자 중 일정 인원을 동일 직무·동일 근무지에서 최대 2년간 근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해마다 퇴직하는 인원의 15%를 이렇게 재고용해 2024년 1분기까지 총 650여명이 채용됐다. KT 관계자는 “시니어들은 장마철엔 통신망 선로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등 숙련된 업무 지식이 많다”며 “후배 인력 양성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 크라운제과도 진천·아산·대전 공장을 중심으로 인력난이 커지자 퇴직을 앞둔 ‘중장년층’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젊은 층이 생산직·2교대를 선호하지 않자 2016년 정년을 만 62세로 연장했고, 정년 이후엔 근로자 의사에 따라 촉탁제로 재고용하고 있다. 김종구 인사노무팀 팀장은 “최고령자는 64세”라며 “제품 생산 과정 중 적합한 배합물성에 대해 잘 아는 중장년 근로자가 생산설비가 달라진 부분을 잡아내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5060 신중년, 고학력·건강 우수·근로의욕↑

인구구조 변화로 노동시장 고령화가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하자 일부 기업에선 은퇴 인력을 다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젊은 신입이 없어 공백 상태인 자리를 당장 채울 수 있는 데다가 오랜 직장생활에서 얻은 노하우가 있어 오히려 업무 효율이 올라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오늘날의 신(新)중년층(55~64세)은 이전 세대와 다른 특징을 보인다. 30.3%가 대졸 이상 학력 소지자일 정도로 과거 세대(70대 대졸 비중 10.6%)와 비교해 학력 수준이 매우 높다. 모바일 기기 사용도 능숙하며 정보기술(IT) 지식도 상당하다. 또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 조건이 우수하고, 근로 의욕을 함께 갖추고 있다. 즉 고용시장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할 수 있다는 풀이다.

통상 고령 근로자의 경우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일부 산업에선 젊은이들과 비교해 생산성 차이가 적다는 현장 반응도 나왔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해 6월 식음료 제조업체 인사담당자 107명을 조사한 결과 생산직에서 55세 이상 고령 근로자의 근로시간 대비 생산성이 2030과 비교해 ‘낮다’고 답한 비율은 13.3%에 불과했다. 55.1%는 ‘보통’, 31.6%는 ‘높다’고 답했다. 오히려 직군에 따라 ▶갈등해결 및 협력 ▶응급상황 조치능력 ▶전략적 사고 ▶기술구조파악 분야는 고령자가 더 우수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퇴 전 업무 이어가야 생산성 저하 최소화”

일할 능력이 있는 고령층에 맞춤형 일자리를 찾아주는 건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실제 지금은 청년 4인당 노인 1명분의 부양비를 지불하고 있지만, 고령화가 심해진 2050년에는 청년 1인당 노인 한 명분의 부양비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영선 경희대 노인학과 교수는 “중장년층이 은퇴 후 일자리에 연착륙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계속고용'을 늘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산업 생산성 저하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서다. 김 교수는 “은퇴 후 새롭게 자격증을 땄어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실전 투입이 어렵다. 반면 수십 년 업무 노하우가 쌓인 곳에선 노화로 인해 신체적 반응 속도가 낮아졌어도 이를 상쇄시킬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만 아직 한국에선 은퇴 전·후 직무 연속성이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13일 발표한 '직무 분석을 통해 살펴본 중장년 노동시장의 현황과 개선 방안'에 따르면 중장년층이 청년기에 전문적 업무를 수행했더라도 퇴직 후 직무단절을 겪으며 저임금·저숙련 직무로 이직하는 경향이 뚜렷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이 일하는 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일정한 나이를 고령의 기준으로 삼아 노동시장에서 배제하는 제도를 손보고, 고령 인력을 계속 고용하는 기업에는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고용 유연성 확보도 필요하다. 김지연 KDI 연구위원은 “연공서열형 임금체계의 경우 재직기간에 비례해 자동으로 임금이 높아지는 만큼, 중장년 근로자의 조기퇴직을 유도하고 재취업 시 일자리의 질을 낮출 수 있다”라며 “재직기간보다는 직무의 내용과 성과에 따른 임금체계를 확대 도입해 직무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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