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준호의 사이언스&

천문과 시각을 동시에 알린 조선의 첨단 시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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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경회루 남쪽에 집 3간을 세워서 누기(漏器)를 놓고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였다. 동쪽 간 사이에 자리를 두 층으로 마련하고 3신이 위에 있어, 시(時)를 맡은 자는 종을 치고, 경(更)을 맡은 자는 북을 치며, 점(點)을 맡은 자는 징을 친다. 12신은 아래에 각각 신패(辰牌)를 잡고, 사람이 하지 아니하여도 때에 따라 시각을 보(報)한다.

천추전 서쪽에 작은 집을 짓고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 하고, 종이를 붙여서 산 모양을 만들어 높이는 일곱 자 가량인데, 집 가운데 놓고 안에는 기륜(機輪)을 만들어서 옥루수(玉漏水)를 이용하여 치게 하였다. 오색 구름은 해를 둘러 나들고, 옥녀는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며, 사신무사(司辰武士)는 스스로 서로 돌아보고, 4신과 12신은 돌고 향하고 일어나고 엎드린다. 산 사면에는 빈풍(豳風) 사시(四時)의 경(景)을 진열하여 백성의 생활이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였다. 기기(欹器)를 놓고 누수의 남은 물을 받아서 천도의 영허(盈虛)하는 이치를 살피게 하였다.‘ (조선왕조 세종실록 77권, 세종 19년 4월 15일에 적힌 보루각 자격루와 흠경각 옥루에 대한 기록)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된 장영실의 자동 물시계 흠경각 옥루(앞쪽)와 보루각 자격루. 프리랜서 김성태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된 장영실의 자동 물시계 흠경각 옥루(앞쪽)와 보루각 자격루. 프리랜서 김성태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精髓)가 한자리에 모인다.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의 한국과학기술사관이 3년간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다음 달 17일 문을 연다. 조선의 주요 과학기술 문물들이 선별됐지만, 전시의 으뜸은 세종 당시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자동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다. 두 물시계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처음이다. 둘 다 조선 최고의 과학기술인 장영실의 작품이지만, 쓰임이 다르다. 자격루는 백성을 위한 국가표준시계다. 경회루 인근 보루각에 설치됐던 자격루가 시간을 알리면, 문루에서 같은 신호를 받아 큰 종과 북으로 서울 시내에 시각을 전파했다. 이전에도 물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록은 자격루 제작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께서는 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잘못 알리게 되면 중벌을 면치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장영실에게 명하여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길 시보인형을 나무로 만들었으니, 이에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리므로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 (세종 16년, 1434년 7월 1일)

국립중앙과학관 3년 리모델링
한국과학기술사관 다음달 개관
자격루ㆍ옥루, 처음으로 한 자리에
“15세기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

반면 옥루는 임금만을 위한 화려한 천문 물시계다. 왕의 침전 바로 옆 흠경각에 옥루를 두고 언제든 시간을 알 수 있게 했다. 둘 다 원형은 남아있지 않다. 자격루만 일부(물 항아리와 수수호 부분, 국보 229호)가 남아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2007년 남문현 건국대 교수팀이 원형을 복원, 2022년까지 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해왔다. 옥루는 조선 중기에 소실된 이후 문헌상으로만 남아있다가 2019년 9월에서야 국립중앙과학관에서 복원했다.

국립중앙과학관 한국과학기술사관 초입에 전시된 소간의와 간의대. 세종의 천문관측 기기 개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국립중앙과학관 한국과학기술사관 초입에 전시된 소간의와 간의대. 세종의 천문관측 기기 개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4계절 변화 보여주는 산 모양 시계 

지난 7일 대전 국립중앙과학관 2층 한국과학기술사관을 찾았다. 개관을 한 달여 앞두고 있었지만, 전시물과 안내판 설치를 마치고 시스템 점검 등 안정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자격루와 옥루는 첫 번째 주제인 ’천문역법 존‘(zone)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2022년 서울 고궁박물관을 떠났던 높이 4m50㎝의 중후한 자줏빛 자격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물항아리 구조물이 오른쪽으로 연결돼 시간을 알리는 장치들을 움직인다. ’탁, 또르르…‘  구슬이 목판 위에 떨어져 둔탁하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누각 위 인형이 움직이며 징과 북을 울렸다.

자격루 바로 옆엔 화려한 천연색으로 단장한 높이 3.3m의 옥루가 우뚝 서 있다. 산의 사면과 그 아래 들판은 4분의 1씩 구획을 나눠 봄·여름·가을·겨울의 자연을 모두 담고 있었다. 겨울의 산과 들판엔 흰 눈이 쌓였고, 가을은 황금 들판과 붉은 단풍으로 단장했다. 산을 둘러싼 들판엔 12지신상이 누워있다가 때가 되면 일어나고, 동시에 땅속에서 12옥녀가 시패(時牌)를 들고 올라와 시간을 알렸다. 산꼭대기엔 금빛 혼천의가 해와 달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물이 수차를 돌리고, 연결된 기륜이 작동하면서 인형과 혼천의를 움직이는 구조다. 옥루엔 과학기술과 아름다움·철학이 모두 담겨있었다. 봄에 모내기를, 가을에 추수하는 모습을 구현한 옥루를 보면서 백성을 생각한 세종의 마음이 느껴졌다.

조선의 최첨단 무기 신기전. 일종의 다연장 로켓포다. 프리랜서 김성태

조선의 최첨단 무기 신기전. 일종의 다연장 로켓포다. 프리랜서 김성태

신기전 등 조선의 첨단 무기들  

옥루 복원을 주도한 윤용현 중앙과학관 박사는 ”흠경각 옥루는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자동물시계가 어우러진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이자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천문시계“라며 ”세종이 1432년부터 7년에 걸쳐 진행한 대규모 천문의기 제작 사업이 완성된 것을 천명한 기념물인 셈“이라고 말했다. 윤 박사는 ”장영실이 세종으로부터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종 3품 대호군에 오른 뒤 임금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 만든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과학기술사관엔 천문역법을 필두로, 인쇄·지리·군사·금속·요업·근현대과학 순으로 전시 주제가 이어졌다. 천문역법 존은 해와 별을 관측하는 소간의(小簡儀)와 간의대, 해 그림자로 절기와 시간을 알 수 있게 한 규표(圭表)로 시작했다. 천문관측 기기의 기본으로, 1432년 세종이 정인지 등에 ”천문의기를 만들라“고 명한 이후 첫 번째 작품이다. 태조 4년 때 한반도의 밤하늘 별자리를 돌에 새긴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228호 복제), 자격루와 옥루, 천체 관측과 시간을 같이 볼 수 있는 송이영의 혼천시계(국보 230호 복원), 홍대용의 혼천시계(복원) 등도 볼 수 있다.

인쇄코너에는 팔만대장경의 인쇄본과 월인천강지곡 조판 금속활자 등 우리 민족의 활자 역사가 전시돼 있다. 지리코너에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 다양한 지도와 조선시대 거리 측정 수레였던 기리고차(記里鼓車) 등을, 군사코너에는 로켓형 발사 무기인 신기전, 시한폭탄의 일종인 비격진천뢰 등 조선의 다양한 첨단 무기들을 관람할 수 있다.

 조선시대 거리 측정 수레였던 기리고차(記里鼓車). 말이 수레를 끌고가면서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프리랜서 김성태

조선시대 거리 측정 수레였던 기리고차(記里鼓車). 말이 수레를 끌고가면서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프리랜서 김성태

권석민 국립중앙과학관장은 ”자격루와 옥루가 제작된 15세기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며 ”1983년 일본에서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전에 따르면 1400~1450년의 주요 업적으로 한국이 29건, 중국 5건, 일본 0건이며, 동아시아 이외의 전 지역이 28건으로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이쯤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 조선 과학기술의 자랑이라는 자격루와 옥루는 왜 대전 중앙과학관에만 있을까. 원래 있던 경복궁은 물론, 대통령실·국회·인천공항에도 전시할 만하지 않을까. 세종대왕 동상이 앉아있는 세종대로엔 왜 세종문화회관만 있고, 세종과학관은 없을까. 어젠다는 실천하는 사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