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혼자가 됐다" 백건우가 ‘최악’의 젊은 날을 극복한 비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한 작곡가의 모든 것을 연구한다. 이번에는 모차르트다. 지난달 음반을 내고 전국에서 모차르트로 독주회를 연다. 강정현 기자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한 작곡가의 모든 것을 연구한다. 이번에는 모차르트다. 지난달 음반을 내고 전국에서 모차르트로 독주회를 연다. 강정현 기자

피아니스트 백건우(78)는 마음 속에 든 말이 많은 듯했다. 그는 지난달 21일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8명에게 공개 레슨을 열었다. 피아니스트들이 모여 공연과 워크숍을 여는 ‘열혈건반’의 한 행사였다. 거기에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노래하라” “숨을 쉬어라” “들어라”.

피아니스트 백건우 인터뷰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 각자의 자리가 있다" #빠르고 능률 중요한 시대에 이야기하는 성찰의 중요성

이달 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화창한 제주에서 모차르트 공연을 마치고 왔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면서 숨 쉬고 들으라는 말이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설명을 이어가던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까지 꺼냈다.

“공개 레슨을 잘 안하는데, 미국에서였던가 한 학생이 자신의 소리를 전혀 못 들어. 피아노를 치기만 하지. 그래서 ‘들리니?’ 물었더니 답을 못해. 피아노 3중주 팀도 있었는데 마찬가지였어요. 무대에서 연주할 위치를 선택했는데 거기서 연주하면 청중이 소리를 전혀 못 들어. 연주만 하지 듣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럴 땐 어떻게 가르치시나요. 듣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 아닐까요?
“타고 나는 게 너무 비중이 크긴 해요. 그 다음에는 훈련이죠. 무엇보다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게 가장 중요해요.”
어떤 독립의 과정을 겪으셨나요.
“나는 (15세에) 미국으로 가기 전에는 음악이 뭔지 피아노가 뭔지 모르고 그냥 친 거예요. 한마디로 엉터리지. 어려운 곡을 쳤다 해서 최연소다, 최초다 했는데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이제 공부 시작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경험이 너무 안 좋아 오히려 피아노하고 거리를 두게 되더라고. 음악은 끌리는데 악기가 두려운 거라.”
10세에 그리그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하셨고, 신동 칭호를 들으셨죠. 그런데 어떻게 엉터리라 느끼셨어요?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소리를 즐기고 뭔가 만들고 한 게 아니니까. 사람들이 칭찬하면 거짓말 같고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내가 어떻게 삶을 살고 음악을 어떻게 할 건지 답이 안 나와. 앞이 캄캄했죠.”
어떻게 하셨나요.
“중요한 건 음악이 좋아서 떠날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음악에 관한 건 뭐든지 했어. 노래 반주, 실내악, 오페라 반주, 보컬 코칭의 반주, 발레 연습 아르바이트, 브로드웨이의 뮤지컬과 연극 반주. 하여튼 다 했어요. 줄리아드 음악원에는 또 좋은 클래스가 많아서 콘트라베이스, 첼로 이런 반주도 다 하고.”
그러다 답을 찾으셨나요?
“그러던 어느날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잘났든 못났든 우리는 다 다르고, 내 자리도 어디엔가 있겠다 싶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피아노겠다. 이제 좀 집중해보자 했죠. 스물 셋, 스물 넷쯤 됐을 때일 거야.”
그때 미국에서 콩쿠르도 입상하고, 화려한 독주자로 부상하기 시작한 거죠?
“근데 내 질문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어요. 훌륭한 연주를 듣고, 선생님의 좋은 충고를 받아도 그게 다 남의 아이디어잖아. 내 음악이 뭔지 찾아야겠다 싶었지. 그래서 유럽으로 온 거고. 운좋게 프랑스 어떤 분이 집에 와 있으라 했어요. 거기에서 한동안 외부하고 접촉을 완전히 끊어버렸어요. 낡은 피아노에서 악보만 가지고 완전히 혼자 공부를 시작했지. 그리고 매일 같이 걸어 다녔어. 주위를 다 보면서 걸었지.”
혼자가 되는 시간이 필요한 거군요.
“내가 지금 꼭 해야하는 게 뭔가를 깊이 고민하게 됐지. 혼자 생각하면서부터 알게 되더라고. 라벨ㆍ무소륵스키 전곡을 녹음한 게 선생님들이 아이디어를 준 게 아니거든요. 그 음악들이 그렇게 매혹적일 수 없어. 내가 좋았고, 사람들도 여기 빠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면 어떨까 했던 거예요. 선생님이 아무리 얘기를 해도, 자기가 보고 느끼고 찾아가야돼.”
이달 1일 강동아트센터에서 열린 백건우의 모차르트 공연. 사진 판테온

이달 1일 강동아트센터에서 열린 백건우의 모차르트 공연. 사진 판테온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죠. 요새처럼 속도가 중요한 시대에 어렵기도 하고요.
“빨리 공부하고 완성하는 건 그냥 능률이지. 본질을 제대로 알 수는 없어. 좋아하는 걸 발견했을 때 희열, 악보에 대한 열정과 사랑 이런 걸 느낄 수가 없잖아.”
그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백건우가 있는 걸까요.
"그건 틀림없어요. 틀림없어. 일부러 그런건 아니고, 또 시대 때문일 수도 있지. 내가 굉장히 내성적이었거든요. 근데 계속 내성적일 수는 없었지. 어느날 프란츠 리스트가 들리기 시작하고 (1982년 파리에서 여섯번)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내성적인 게 바깥으로 나오는 게 느껴졌어요. 그 작곡가를 연주하려면 내성적이서는 안되니까. 긴 여정 중의 한 순간이었죠."
언제나 모든 버전의 악보, 문헌을 구해서 철저히 연구하시죠.
“연주 여행을 갈 때마다 지역 도서관, 국회 도서관, 옛 악보 서점 같은 데를 다 돌아다녀요.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도 버전이 다섯 개가 있는 걸 아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돌아다니며 찾고, 버전마다 다 찾는 거지. 어떤 때는 엉뚱하게 미국 시골의 음악 학원에서 악보를 찾아. 드뷔시가 피아노 연주법에 대해 쓴 악보를 찾고 너무 기뻤어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너무 궁금하고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자연히 그렇게 하게 돼. 시간은 들지.”
요새는 지루하고 시간 걸리는 일을 못 견디죠.
“연주를 해보면 신기해요.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곡을 그래도 훌륭하다고 여겨 연주하면, 그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해. 메시앙, 부조니, 그리고 슈만의 ‘유령 변주곡’, 모차르트 ‘프렐류드와 푸가’…. 진실된 음악이라서 그래요. 그 작품이 우리에게 정말 주는 게 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있다는 믿음으로 계속 가는 거죠. 그러다보면 조금씩 한겹 두겹 벗겨지기 시작해.”
그러면 본질에 도달하게 되나요?
“완전히 이해하고 끝까지 봤다고 하는 사람 있으면 그건 잘못된 길로 간 거야. 미켈란젤로도 다비드상을 미완성이라고 했다잖아요. 그게 우리 길이야.”
그 과정은 즐거우신가요?
“괴롭기도 하고, 남이 상상 못할 희열도 느끼고. 나만이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세계도 발견하고. 음악은 무한한 힘이 있거든. 그런데 요즘엔 음악가가 너무 직업이 돼버린 것 같긴 해요.”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 각자의 자리가 있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 각자의 자리가 있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요즘 젊은 예술가들도 천천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 과정을 갈 수 있을까요?
“있겠죠. 힘들겠지만. 근데 봐요. 예술을 하다보면 얼마든지 쉽게 살 수 있잖아. 근데 진짜 예술가들은 다 어렵게 살았어. 그 사람들이 그 삶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쉬운 삶은 자기 게 아닌 거지. 나도 절망할 때도 많았고, 큰 돈도 벌 수 있었고, 쉽게 갈 수도 있었지. 그래도 이게 내 삶인 것 같아. 그 이상도 안 바라고.”
광고 촬영 제의도 많이 들어왔죠?
“별 광고가 다 들어왔어. 진희 엄마(고 윤정희 배우)만 찍자, 같이 찍자, 아기랑 찍자…. 근데 하나도 안 했어. 나는 나름대로 참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해. 근데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던 삶을 돈 주고 바꾸고 싶지 않아요. 이 사람들은 과정은 생각 안 하고 이름만 필요한 거잖아.”
느리고 힘들게 걸어오신 과정을 지키고 싶으신 거죠.
“자기한테 주어진 것을 할 때 행복해. 누굴 본따면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등수 없는 콩쿠르도 만들고 싶어. 우리가 도와줄 사람들만 뽑아서 도와주는 걸 하고 싶어요.”

백건우는 젊은 음악가들이 음악에 실컷 빠져서 살고, 자신의 고독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언젠가 마련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도 천천히 곱씹으며 선택한 작곡가, 모차르트를 연주한다. 68년 피아니스트의 길 중 최초의 모차르트 녹음인 그는 "내 머릿속에서 제일 많이 떠도는 단어는 언제나 '데뷔'"라고 했다. 백건우의 모차르트 무대는 11일 서울 예술의전당을 거쳐 15일 인천, 21일 함안으로 이어진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