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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랑GO] 1910년 국권 피탈~1945년 광복…일제강점기엔 어떻게 살았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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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심심해~”를 외치며 꽁무니를 따라다닌다고요? 일기 숙제를 해야 하는데 ‘마트에 다녀왔다’만 쓴다고요? 무한고민하는 대한민국 부모님들을 위해 '소년중앙'이 준비했습니다. 이번 주말 아이랑 뭘 할까, 고민은 ‘아이랑GO’에 맡겨주세요. 이번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인 일제강점기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서울 용산으로 떠났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

서울시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와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 빛나는 항일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시하는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 역사박물관이다. 2층에 올라가면 4가지 주제로 구성된 상설전을 관람할 수 있다.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란 질문과 함께 영상으로 시작하는 1부 초입에선 화려한 색채로 청일전쟁을 묘사한 일본 판화 ‘니시키에’ 두 점이 눈에 띈다. 그 옆에는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주사위 놀이판이 놓였다. 김종욱 사무국장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에 승리를 거듭한 일본은 승리를 축하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강력한 일본군을 그린 판화를 대량 유포하고, 한반도와 주변 바다를 전쟁 놀이터 삼아 육군·해군으로 편을 나눠 누가 먼저 청나라 수도인 북경(베이징)까지 가는지 겨루는 주사위 놀이를 즐겼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이채로운 건 출발도시다. “육군은 히로시마, 해군은 나가사키. 이 두 도시는 일본 군사력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를 마비시켜 전쟁을 끝내려 했어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후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했죠.”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종욱(뒷줄) 사무국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조선총독부에서 식민통치를 시행한 8명의 총독에 대해 설명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종욱(뒷줄) 사무국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조선총독부에서 식민통치를 시행한 8명의 총독에 대해 설명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 것을 결정,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지도·감독에 나섰다. 1907년엔 고종을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및 사법권을 위임받고, 한층 강력한 침략행위를 거듭한 끝에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국권을 피탈한다. 경술년의 국가적 치욕이란 의미로 경술국치라고도 하는 이 사건으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넘기며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락한다.
35년간 식민통치 및 수탈에 앞장선 8명의 총독의 얼굴도 볼 수 있다. 을사늑약으로 보호정치를 시행하기 위해 설치한 통감부를 맡았다가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부터 3·5대를 역임한 사이토 마코토 등의 사진을 가리킨 김 사무국장이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고 귀띔했다. “외형적으로 대머리인 것도 맞지만, 모두 별 4개의 육·해군 대장으로 군인 출신입니다. 일본 내각이 아닌 일왕 직속으로 직접 명령을 받고 보고하는 위치였죠. 조선총독을 거쳐 일본 총리가 된 사람도 여럿이에요.”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3대 통감이자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1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왼쪽부터)가 실린 ‘일한병합엽서’. 민족문제연구소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3대 통감이자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1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왼쪽부터)가 실린 ‘일한병합엽서’. 민족문제연구소

을사늑약에 찬성해 서명한 다섯 대신을 흔히 을사오적이라고 한다. 그중에는 친일파 하면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오는 이완용이 있다. “많은 사람이 친일파로 이완용을 떠올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이완용은 을사오적이자 정미칠적(정미7조약)이자 경술국적(한일병합조약)으로, 당시에도 매국노로 크게 지탄받았습니다. 다만 광복 후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이완용이 모든 친일 행위를 떠안고 그 뒤로 많은 친일파가 숨게 됐어요.”
친일·매국행위로 많은 이가 일본의 귀족 작위와 은사금(돈)을 받았는데, 명단을 살펴보니 낯선 이름인데 작위도 높고 돈도 많이 받은 사람이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김 사무국장은 “이재면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고종의 친형으로, 황족대표로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동의했다”며 “황제의 친형도 나라를 넘기는 데 역할을 했다고 조선 사람들을 설득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1911년 1월 1일자 교토히노데신문(京都日出新聞) 부록 ‘일출신문조선쌍육’. 놀이를 통해 일본인에게 조선침략의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세뇌하는 도구였다. 민족문제연구소

1911년 1월 1일자 교토히노데신문(京都日出新聞) 부록 ‘일출신문조선쌍육’. 놀이를 통해 일본인에게 조선침략의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세뇌하는 도구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 시절 사진들은 일본인이 찍은 게 많다. “앞서 본 니시키에처럼 일제는 사진을 역사 서술에 주요한 매체로 활용했다”고 말한 김 사무국장은 3·1운동 이후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전환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금강산 유람 사진을 예로 들었다. 사진 속 사이토 마코토는 번듯한 옷차림으로 가마에 탔고, 가마를 메고 끄는 조선인은 마른 몸에 옷도 변변찮았다. “이런 사진은 식민 지배를 당연시하기 위한 기술로, 공통적으로 못사는 조선인과 잘사는 일본인을 보여줘요. 이렇게 미개한 조선(인)은 선진국인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게 당연하고, 일본 덕분에 조선이 발전했다는 건데요. 사실은 달라요. 단적으로 1920년대 신체계측 통계를 비교해보면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키도 크고 체중도 많이 나가죠.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방까지 단 한 차례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답니다.”
‘1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학교·감옥’을 통해 이를 잠시나마 체험할 수 있다. 일본 순사 그림자 앞 작은 책상에 앉아 4명의 이름이 적힌 버튼 중 ‘노예달’ 이름의 버튼을 눌러봤다. 일본 순사의 신문과 함께 나이 19세, 유관순 열사와 같은 이화학당의 고등과 2학년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3월 5일 남대문역 만세 시위에 참여해 징역을 선고받고 미결수로 8개월의 옥고를 치른 그가 왜 만세를 불렀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 담담히 말하는 걸 들으며 소중 학생기자단은 숙연해졌다. 당시 조선 인구가 2800만 명 정도였는데 독립만세운동에 나선 사람이 전국 곳곳 각계각층을 망라해 220만 정도로 추산되는 등, 3·1운동은 식민지 극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참여한 대표적인 사례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1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학교·감옥’ 코너에서 고문용 벽관에 들어간 홍원교 학생기자.

‘1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학교·감옥’ 코너에서 고문용 벽관에 들어간 홍원교 학생기자.

그 옆으로 끌려가는 사람 형상과 함께 벽관이 설치됐는데, 중학생인 홍원교 학생기자가 들어가자 꼭 맞는 크기였다. “이렇게 좁은 곳에 갇혀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으면 다리로 피가 몰려 퉁퉁 부어요. 벽관 고문을 당하면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발로 걸어 나오질 못했죠. 일제는 친일파에겐 돈도 주고 했지만, 독립운동을 하거나 반항하는 이에겐 각종 고문을 강행했어요. 식민통치에 저항하지 못하게 일종의 본보기를 보인 거죠.”
1931년 만주 침략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진주만 기습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총동원체제로 식민지를 수탈했던 상황도 살펴볼 수 있다. 김 사무국장이 나무로 된 부채 같은 전시물을 가리켰다. “우리나라 압록강 주변엔 숲이 울창했어요. 거기 자생하는 나무 종류와 수량을 적은 ‘압록강 재감’입니다. 나무 수탈용으로 배포했죠. 전국 모든 산림자원에 이런 게 있었을 거예요.” 일제는 산림뿐 아니라 지하·해양자원도 약탈하고, 전쟁 자금을 위해 세금을 올리고 헌금·헌납도 강요했으며, 쌀 같은 생필품도 샅샅이 훑어가고 배급제를 실시했다.

1940년대 공출당한 금속류 식기 대용품으로 제작된 사기그릇(오른쪽)과 찻잔.

1940년대 공출당한 금속류 식기 대용품으로 제작된 사기그릇(오른쪽)과 찻잔.

“하도 많이 수탈하다 보니 풍년이 들어도 배고프고 흉년 들면 굶어 죽는다는 말도 있었어요. 쌀뿐만 아니라 밥그릇까지 뺏어갔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밥상 위의 사기그릇에 주목했다. “조상 제사를 중시한 조선에선 집집마다 유기그릇을 갖췄어요. 놋그릇이라고 하는데 재료인 구리는 총알 등 전쟁물품을 만드는 재료기도 했죠. 못 먹고 못 살아도 제사 지내는 유기그릇은 지켰는데 결국 밥그릇·수저까지 다 뺏기고 대신 사기그릇을 식기로 쓰게 됐죠.” 각종 자원뿐 아니라 사람들도 동원됐다. 군인·군속으로 끌려간 청년은 40만 명 이상, 강제 동원 노동자들은 최소 72만 명 이상이었다. 전쟁에 나간 이의 무운장구를 빌기 위해 천 명의 여성이 한 땀씩 꿰매 만든 ‘천인침’ 등 군 위문품도 눈길을 끌었다.
‘3부 한 시대의 다른 삶: 친일과 항일’에선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친일파와 고난 속에서도 끝없이 항쟁한 독립투사들을 마주할 수 있다. 김 사무국장이 먼저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 초판본을 보여줬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즉 우리는 지금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국민이라는 것을 선언한 거예요. 선언서 뒷면에는 ‘순사가 습득한 종이’라고 적혔는데, 현장에서 주워 증거물로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자, 이제 첫 줄을 자세히 보세요.”

함흥 지역에서 발견된 1919년 3·1 독립선언서 초판본. 첫줄 도입부에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구절의 ‘조선’이 ‘선조’로 인쇄됐다. 민족문제연구소

함흥 지역에서 발견된 1919년 3·1 독립선언서 초판본. 첫줄 도입부에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구절의 ‘조선’이 ‘선조’로 인쇄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선언서를 들여다보니 한자가 가득하고 한글은 조사 정도라 읽기가 어려웠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 이라고 해야 하는데 선조라고 오타가 났어요.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이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걸 아는 상황이었어요. 감시를 피해 몰래 인쇄하다 보니 오타를 미처 모른 채 3만 부를 찍어 서울에서 부산·광주·의주·함흥 등으로 비밀리에 보냈죠. 국내에는 8장 정도 남아있는데 그중 한 장으로 함흥에서 발표된 겁니다.”
독립선언서가 전시된 벽에는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가계도가 걸렸다. 1911년 모든 재산을 처분해 일가족과 서간도로 망명한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서로군정서를 조직하고 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냈다. 또한 부인 김우락, 동생 이상동·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손자 이병화, 손부 허은, 당숙 이승화 등 3대에 걸쳐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의 독립투사들은 봉오동·청산리대첩 등 일제에 맞선 전투마다 활약했다.
그 맞은편에는 대를 이어 영화를 누린 친일파 윤치호 일가의 가계도가 걸렸다. “가계도를 보면 생몰년이 쓰였어요. 계산해보면 윤치호 일가 사람들은 대부분 80세를 넘게 살았는데, 이상룡 집안은 보통 50대 정도죠. 경북 안동에 이상룡의 생가 임청각이 남아있는데, 1942년 일제가 중앙선 철로를 놓아 반토막을 냈어요. 현재 훼손됐던 고택을 복원 중입니다.”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문화정치를 내세워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친일세력 육성에 적극 나섰다. 경찰·군장교·판검사 등 일제 통치기구에서 중심 역할을 한 직업적 친일파가 나타나고 영향력이 큰 지식인들이 변절해 친일 행위에 앞장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파리가 나치 군대에 점령됐는데, 파리를 수복한 뒤 프랑스는 나치 협력자들을 4만 명가량 법정에 세웠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던 단 한 사람도 법정에 세우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건 스스로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경우도 없었다는 거예요.”

김 사무국장은 부끄러운 역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대면해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18년에 걸쳐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김 사무국장은 부끄러운 역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대면해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18년에 걸쳐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4부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선 식민통치 후유증과 일제 잔재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로 이뤄진 과거청산운동에 대한 기록을 다룬다. “독립선언서 초안을 썼던 최남선도 나중엔 친일파가 됐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행적을 제대로 알리고, 반성하고 해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하다고 봐요. 과거를 돌이켜보고 잘한 것은 더 잘하고, 잘못한 건 반성하고 다시 그러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거니까요. 자랑스러운 항일투쟁의 역사 이면에는 부일협력이란 치욕스러운 과거도 있죠. 이런 부끄러운 역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대면해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18년에 걸쳐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수록 대상자는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국내 최초 일제강점기 전문 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왼쪽부터 홍원교·박서후·조현하·이윤슬 학생기자.

소중 학생기자단이 국내 최초 일제강점기 전문 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왼쪽부터 홍원교·박서후·조현하·이윤슬 학생기자.

“박물관 이름에 식민지가 들어가다 보니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부끄럽고 힘든 과거는 잊고 좋은 걸 자랑하고 과시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죠. 다만 과거를 감춘다고 다 감춰지진 않아요. 잘 기억하고 잘 기록해 이를 드러내고 반성하고 성찰할 계기를 마련하는 게 부끄럽고 힘든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길입니다. 일제 식민지·전쟁범죄 관련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고, 아직 사과도 보상도 받지 못한 피해자가 있어요. 당시 억압받고 당했던 것을 되돌려준다거나 모든 일본인을 미워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의 어려움을 현재에 반복하지 않고, 피해자에 적절한 보상과 사과가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죠. 또 이렇게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매듭을 지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이런 메시지를 계속 전하려고 상설전 외에도 기획전을 열거나 특강·답사·스탬프 투어 등 참여 프로그램도 마련하는 등 노력하고 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장소: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47다길 27
관람 시간: 화~일요일(월요일, 1월 1일, 5월 1일, 설‧추석 연휴 휴관) 오전 10시 30분~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30분)
전시 해설 예약: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 및 전화(02-2139-0427) 신청
관람료: 일반인(19~64세 이하) 3000원(15인 이상 단체 2500원), 청소년(8~18세 이하) 1500원(15인 이상 단체 1000원) ※별도 공지 시까지 무료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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