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안혜리의 인생

대학 총장만 3번째인 야구선수…박노준 이끈 '1만개 전화번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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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달 22일 전북 완주 우석대 총장실에서 박노준 총장을 만났다. 안양대 총장 임기를 지난 2월 28일 마치자마자 딱 하루만 쉬고 바로 우석대 총장이 됐다. 장진영 기자

지난달 22일 전북 완주 우석대 총장실에서 박노준 총장을 만났다. 안양대 총장 임기를 지난 2월 28일 마치자마자 딱 하루만 쉬고 바로 우석대 총장이 됐다. 장진영 기자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부상(負傷). 

야구 잘 아는 '야잘알'뿐만 아니라 1970~80년대를 살기만 했어도 단박에 이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까. 맞다. 선린상고 출신 박노준(62) 선수 얘기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 경기마다 수만 관중이 운집할 정도로 고교 야구가 인기 절정을 누리던 1981년 8월, 지상파TV로 전국에 생중계되던 경북고와의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선린상고 3학년 박노준은 홈으로 슬라이딩하다 발목이 완전히 꺾여 뼈가 세 동강 나고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천재'로 불린 원조 아이돌급 스타
"난 매스컴이 만든 과포장 선수"
인기·명성 편승 대신 끝없이 노력
'무식' 편견도 공부 원동력 삼아
1만개 저장 번호는 가장 큰 자산

가왕 조용필(74)보다 앞서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닌 원조 아이돌급 스타답게 그가 7~8시간 대수술을 받고 입원한 한국병원 앞에는 여고생 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다음날 각 신문은 경북고 우승보다 박노준 부상 소식을 더 크게 다뤘고, 방송사는 중계차까지 동원했다. 그 시절 야구를 잘 모르는 '야잘못' 남녀노소 모두에게 '박노준' 이름 석 자가 각인된 이유다.

지난 1981년 경북고와의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발목을 크게 다쳐 한국병원에 입원했던 당시의 모습. 병실 밖에 여고생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중앙포토]

지난 1981년 경북고와의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발목을 크게 다쳐 한국병원에 입원했던 당시의 모습. 병실 밖에 여고생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중앙포토]

한국 프로 선수와 미국 메이저리그 코치, 우석대 교수 등을 거친 그가 지난 3월 한의대·간호대로 이름난 전북 완주 우석대 총장이 됐다. 그것도 안양대(2020~24)에 이어 두 번째 맡는 '경력직' 총장이다. 국가대표까지 지낸 엘리트 선수 출신으론 유일무이한 데다 학계 내에서도 학교를 넘나들며 3연임 한 드문 사례다. 기초적인 학습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팀 승리를 위해 혹사당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에 선수생활을 한 그가 어떻게 이런 인생 반전을 이뤄냈을까. 그 답을 찾아 완주에 갔다. 3시간 가까운 총장실 인터뷰로도 모자라 전주비빔밥과 육사시미로 유명한 전주의 한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함께하며 들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박 총장 시각에서 재구성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의 인생

야구 못하는 야구 천재의 탄생

"딱 3개월만. "
국민학교 5학년 때 아버지의 이 제안이 없었다면 야구 선수 박노준은 없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야구 선수로 키울 생각은 아니었다. 아파서 결석 많이 하는 장손 건강 챙기겠다고 권했을 뿐이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열심히 했다. 성과가 나니 재미도 있었다. 책 좋아하던 영문학도 아버지는 정작 탐탁지 않아 했지만, 난 약속한 3개월 후에도 계속 하고 싶었다. 서울 연희동 집에서 가까운 야구 명문 선린중을 골라 갔고, 그때부터 '야구 천재'로 매스컴을 무지하게 탔다.

우석대 총장실에 놓여 있는 선린상고 시절 액자. 프로 데뷔 때까지 투타겸업을 했던 박노준 총장은 "이렇게 멋진 투구 폼을 담은 사진이 없어 당시 신문을 오려 액자에 담았다"고 했다. 장진영 기자

우석대 총장실에 놓여 있는 선린상고 시절 액자. 프로 데뷔 때까지 투타겸업을 했던 박노준 총장은 "이렇게 멋진 투구 폼을 담은 사진이 없어 당시 신문을 오려 액자에 담았다"고 했다. 장진영 기자

특히 고교 신입생이던 1979년 4대 메이저 첫 대회인 중앙일보 주최 대통령 배(盃)를 10년 만에 우승하고 최우수선수상을 받자 야구계에선 "물건 하나 나왔다"며 흥분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난 야구를 정말 잘한 게 아니라 매스컴이 만든 선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10점 만점에 5점 수준에 불과했다. 워낙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보니 "기대치만큼 빨리 실력을 끌어올려야겠다"며 노력했고, 덕분에 기량을 7, 8까진 만들었다. 이승엽(48·두산 베어스 감독) 등 타고난 재능의 선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세계대회 등 주요 경기 때면 펄펄 날아 MVP를 다 차지했다. 80년 선린상고가 11년 만에 청룡기와 황금사자기를 되찾아올 때도 개인상을 휩쓸었다. 특히 광주일고와 붙은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당대 최고 선동열 투수를 상대로 2점 홈런, 투수로는 5회 구원등판해 삼진 8개를 잡아 우수투수상을 거머쥐었다.

나보다 잘하는 선수가 즐비했는데 번번이 내가 더 돋보인 이유가 있다. 그들은 긴장했고, 나는 즐겼다. 큰 경기일수록 동료들은 덜덜 떨어 제 기량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 반면 난 실력을 다 보여줬다. 2007년 국내 첫 외국인 감독인 롯데 자이언츠의 명장 제리 로이스터가 강조한 '두려워하지 마라(No Fear)'는 진작부터 내 인생의 모토였다.

야구 실력과 상관없이 어떤 면에선 '난 놈'이었다. 결정적 순간마다 괴력을 뿜는 두려움 없는 강심장을 타고났으니 하는 말이다.

고교 시절부터 워낙 여학생들이 들러붙으니 아버지가 집과 학교 픽업을 도맡아 하며 연애를 원천 차단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막지 않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다. 인기도 명성도 반갑지 않았다. 나만의 무기(실력)가 없다면 다 뜬구름처럼 부질없는 독(毒)이란 걸 이미 그때 알았다.

공부하는 운동선수의 탄생

신문에 한자가 한글보다 더 많던 고교 시절부터 신문을 봐왔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많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운동선수가 한자 읽는 걸 믿기 어려워서일 텐데, 이런 멸시가 평생 콤플렉스였다. 그땐 공공연하게 "무식해서 딸 안 준다"고들 했다. 어려서부터 교지에 글 쓰고, 늦은 나이에 석사(성균관대)·박사(호서대 스포츠 경영학) 딴 것도 어딜 가든 무식하다고 무시당하지는 말자는 다짐이 컸다.

부와 명예에 아무 관심 없던 아버지가 학위엔 큰 칭찬을 할 정도로 학습을 중요시하기도 했지만, 선린상고 선배이자 당시 박용진 감독(76·1977~79 재직)과 후임 구본호 감독, 박노원 야구부장 선생님 모두 공부를 중요시한 덕도 봤다. 경쟁 학교들은 전국대회 때면 컨디션 조절하라고 아예 수업을 뺐지만 우린 달랐다. 중요한 전국대회 날도 오후 경기면 무조건 오전 수업을 들었다. 상업학교라 은행 취업을 목표로 주산을 가르쳤는데, 사회에 나갈 즈음엔 전자계산기 쓰지 주판 굴릴 일은 없을 거라 판단해 난 그 시간에 영어·한문 공부를 했다. 은퇴 후 뉴욕 메츠 코치로 채용된 것도 이때 공부가 밑거름됐다.

지난 1999년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에서 코치 생활을 할 때 동료 코칭스태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보비 발렌타인 당시 뉴욕 메츠 감독. [사진 박노준]

지난 1999년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에서 코치 생활을 할 때 동료 코칭스태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보비 발렌타인 당시 뉴욕 메츠 감독. [사진 박노준]

지난 1999년 미국 뉴욕 메츠 코치 시절 박찬호와 함께. 이듬해 경인방송에서 메이저리그에서의 박찬호 활약을 중계하는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사진 박노준]

지난 1999년 미국 뉴욕 메츠 코치 시절 박찬호와 함께. 이듬해 경인방송에서 메이저리그에서의 박찬호 활약을 중계하는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사진 박노준]

편견이 지긋지긋해 공부했지만, 돌이켜보면 야구 자체가 큰 인생 공부였다. 사회생활의 핵심 덕목인 '나' 아닌 '우리'라는 팀워크를 배웠다. 위기 다음 찬스를 맞는 경기 경험은 어려운 일이 닥쳐도 "더 좋은 일이 생기려고 지금 바닥에 왔구나"라는 긍정적 사고를 만들었다. 제일 좋아하는 단어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여전히 잊히지 않는 1981년 봉황대기 결승전 부상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슬라이딩을 잘 못 했다. 홈을 파고드는 짧은 순간 사이드냐 스탠더드냐를 결정 못 해 어정쩡한 슬라이딩을 했고, 하필 전날 비 온 뒤 딱딱하게 굳은 그라운드에 스파이크가 박히는 바람에 사달이 났다. 우승 못 한 게 분했을 뿐, 한국 최고 정형외과 전문의 한두진 박사(1928~2023)의 "선수 생명 장담 못 한다"는 말엔 낙담하지 않았다. 고려대 시절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과 1986년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1순위 지명, 골든 글러브(1994) 수상 등 영광을 누리다 무려 7번의 부상과 성적 부진으로 2군과 후보를 오간 끝에 1997년 은퇴했을 때도, 좌절이나 절망 대신 "좋은 인생 경험했다" 싶었다.

유복한 집에서 모자람 없는 지원을 받고 큰 내겐 이런 인생의 쓴맛과 굴곡이 축복이었다.

엘리트 운동선수 출신 총장의 탄생

굳이 꼽자면 내 인생 암흑기는 2008년 히어로즈 단장 때, 황금기는 마음껏 연구하며 젊음이란 무기를 장착한 학생들과 만나던 우석대 교수(2011~19년) 때다.

히어로즈 단장 시절 '사람 무섭다'는 걸 처음 알았다. 비단 지난 2018년 횡령·배임으로 징역 4년 선고받고 KBO(한국야구위원회)의 영구 퇴출 징계를 받은 이장석(58) 히어로즈 대표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는 후배와 등 돌린 친한 기자 등에 대한 배신감으로 당시엔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이 자산'이라는 걸 더 뼈저리게 느꼈고, 지금 총장직의 토대가 됐다.

지금 내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만 1만 개가 넘는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이 지금의 자리로 이끌었다. 박사 학위 따자마자 날 교수로 채용하고 안양대 총장 임기 끝나기가 무섭게 이례적으로 우석대 총장 자리를 제안한 우석대 이사장도 사회에서 만난 은인이다.

꾸준한 신문 정독과 도전 정신을 불어넣는 정주영·이병철 등 위대한 창업자들의 자서전은 히어로즈 단장 시절 후원기업 하나 없는 가난한 구단 살림 꾸릴 때 인사이트를 줬다. 한국 스포츠업계 최초로 명명권(naming rights)을 도입해 우리(담배)·넥센(타이어)에 이어 지금의 키움 히어로즈로 이어졌고, 이젠 다른 종목으로도 퍼졌다. 유니폼 스폰서 광고 역시 KBO와 협의해 4개에서 7개로 늘렸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펀딩하고 마케팅하는 경영 능력을 옆에서 지켜본 지인들이 계속 기회를 줬다.

박노준 우석대 총장(왼쪽)은 지난 3월 이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조만간 이 지역에 들어설 수소 특화 국가산업단지에 발 맞춰 학교를 수소 중심대학으로 개편하는 작업의 시동을 걸었다. 글로컬대학 선정을 위한 학교 공청회를 주재하는 모습. [사진 완주대]

박노준 우석대 총장(왼쪽)은 지난 3월 이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조만간 이 지역에 들어설 수소 특화 국가산업단지에 발 맞춰 학교를 수소 중심대학으로 개편하는 작업의 시동을 걸었다. 글로컬대학 선정을 위한 학교 공청회를 주재하는 모습. [사진 완주대]

돌이켜보면, 죽을 맛이었던 히어로즈 경험이 학생 감소 위기에 몰린 지방대학 경영에까지 도움을 주는 셈이다. 부임하자마자 글로컬 대학 선정 작업을 주도하자 교직원들은 "분위기 익히는 데만 통상 6개월 이상 걸리는데, 조직 장악력이 대단하다"고 치켜세운다. 솔직히 별 게 아니다. 솔선수범하면 된다. 느지막이 나와 오후 2시쯤 가도 누가 뭐라기는커녕 임기를 보장받지만, 지금껏 그래왔듯이 매일 오전 6시에 출근해 학교 관련 각종 수치를 챙기며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지금 눈여겨보는 건 입학 숫자다. 과거엔 미달을 우려해 성인 학습자와 외국인 학생을 더 받는 미봉책을 썼다. 난 방향을 바꿨다. 완주에 들어설 수소 특화 국가산업단지에 맞춰 우석대를 수소 중심대학으로 개편하고, 국가대표 선수촌과 가까운 진천 캠퍼스는 미래 블루오션이 될 스포츠 산업 인력을 키우는 특화 캠퍼스로 구상 중이다. 투타 겸업은 실패였지만, 운동·공부 두 마리 토끼 잡기는 날 성공 가도로 끌어주고 있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