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2015년엔 먼저 협상 요구…확성기, 김정은 감내 못할 한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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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3일 남북정상회담을 나흘 앞두고 오후 경기도 파주 전방 철책 부근에 기동형 확성기 차량이 운용을 멈춘 채 자리하고 있다. 확성기 차량 뒤 철책 너머로 안개 속에 가려진 북한군 초소의 모습이 산 능선과 함께 흐릿하게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4월 23일 남북정상회담을 나흘 앞두고 오후 경기도 파주 전방 철책 부근에 기동형 확성기 차량이 운용을 멈춘 채 자리하고 있다. 확성기 차량 뒤 철책 너머로 안개 속에 가려진 북한군 초소의 모습이 산 능선과 함께 흐릿하게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2일 정부가 꺼낸 ‘대북 확성기 카드’에 그간 북한은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북한 체제의 균열을 야기하는 강력한 심리전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물 풍선·위성항법장치(GPS) 교란 전파·탄도미사일 등 전방위 도발을 하고 있는 북한을 향해선 그만큼 실효적인 대응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국군심리전단이 운용하는 대북 확성기는 개성·철원·평강·고성 등 접경 지대를 겨냥한 전방 10여 곳에 고정식·이동식(차량)으로 고출력 스피커 40여개를 동원해 북한의 ‘김씨 일가’의 실태를 고발하고, 한국 가요 등을 방송해왔다. 최전방의 북한 군인들은 물론 군사 분계선을 넘어 20~30㎞까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기상 상황 등에 영향을 크게 받는 대북 전단보다 훨씬 유용한 대북 정보 유입 수단인 셈이다.

정부가 ‘감내하기 힘든 조치’에 곧바로 착수한다고 밝힌 가운데 당장 전방에 스피커를 다시 설치하거나, 방송 지역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등 준비 작업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일부 지역에서 일단 방송을 재개한 뒤 북한의 반응에 따라 단계적으로 지역을 확산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북한의 태도 변화가 있을 경우에는 확성기 재설치에서 일단 정부가 행동을 멈추고, 추가 조치를 다시 결정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대북 방송은 최근 부쩍 외부 문화 유입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서는 폐부를 찔리는 격이 될 수 있다. 김정은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 평양문화어보호법 등까지 만들어 한국 문화가 퍼지는 걸 막는 데 급급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선대의 통일 유훈마저 저버리며 남북관계를 동족이 아닌 ‘교전 중인 적대적 관계’로 전환한 것 역시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한국적 요소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경계심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북 확성기가 군사적 조치보다는 낮은 단계이면서도 북한 정권에 줄 수 있는 실질적 타격은 큰 효과적 수단으로 꼽혀온 이유다. 실제 2015년 목함 지뢰 도발에 대응해 박근혜 정부가 확성기를 틀자 북측이 먼저 협상을 제안하고 테이블에 앉기도 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1963년 5월 서해 부근 휴전선 일대에서 최초로 실시됐다가 대북 경색·유화 국면에 따라 철거와 재개를 반복해왔다. 최근에는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을 계기로 재개했다가, 2018년 5월 대북 유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장비를 철거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아예 확성기 방송 금지를 명문화했는데, 같은 해 남북 정상이 합의한 4·27 판문점 선언에는 “5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들을 중지하고 그 수단을 철폐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때문에 대북 확성기 송출을 위해서는 법적인 충돌 소지부터 해소해야 한다. 판문점 선언 뿐 아니라 지난 정부에서 이를 근거로 개정한 현행 남북관계 발전법(2021년 3월 시행)은 24조 1항에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북한에 대한 확성기 방송, 북한에 대한 시각 매개물, 전단 살포 등’을 금지했다. 헌법재판소가 해당 법에 대해 일부 위헌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는 전단 살포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확성기 방송 등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실정법 위반 소지를 해소하려면 정부는 판문점 선언의 효력부터 일부 정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 발전법에서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거나 국가안전보장 등을 위해 필요한 경우 기간을 정해 남북 합의서의 효력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정지시킬 수 있다"(23조 2항)고 규정한 게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게 정부의 해석이다.

판문점 선언 외에 9·19 남북 군사합의서에도 “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함께 효력 정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다만 정부가 아껴온 대북 카드를 써버리는 데 대한 우려도 있다. 북한의 오물 풍선 작전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등에서 더 큰 도발을 위한 명분 쌓기"란 시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북한이 오물 풍선 관련 소식을 북한 주민들을 겨냥한 대내 매체엔 알리지 않고 있는 것도 체제 ‘내구성’을 다지며 더 강한 도발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앞서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달 29일 오물 풍선과 관련해 “우리 인민의 표현의 자유”라는 담화를 냈는데, 정작 이는 대외 매체인 조선중앙통신 등에만 보도됐다. 대내 매체인 노동신문에선 다뤄지지 않았다. 이튿날 김정은의 초대형 방사포 현지 지도를 노동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린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북한이 대남 오물 공세를 퍼부은 1일에도 대내 매체들은 최선희 외무상 등 당 간부들이 김정은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교육을 받았다는 소식만 알렸다.

북한이 확성기 방송 재개를 빌미로 고강도 도발에 나설 경우 마땅한 대응책이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뒤따르는 이유다. 이에 대해 장호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반복될 경우 우리의 대응 단계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한·미 연합 자산을 활용한 정찰 강화 등 다양한 억제력 강화 조치도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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