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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예산 확대 앞서 시스템부터 개혁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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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내년도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은 올해보다 늘어날 것 같다.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R&D 투자 규모의 확대를 여러 번 약속했고, 지난달에는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이 내년도 R&D 예산은 역대 최고 규모로 편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정부 발표를 보고 올해 갑작스럽게 대폭 삭감된 R&D 예산 때문에 현장에서 고생하고 있는 과학기술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물론 올해의 고생이 없었더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뒤늦게라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고치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정부의 내년 R&D 예산 확대 약속
과학계 환영하나 재발 우려 불안감
‘최고급’ 연구 위한 시스템 혁신 필요
규제 대신 신뢰 기반 제도 도입해야

하지만 예산 확대에 앞서 정부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R&D 지원시스템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사실 과학기술계는 이번 발표에 안도하면서도, 또다시 비슷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올해의 예산 삭감은 나누어먹기식 카르텔이 그 이유로 지목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R&D 예산이 비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의구심에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 R&D 투자의 효율성에 관한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왜 우리나라 연구개발 투자는 선진국 수준인데, 미국이나 이스라엘 같은 획기적인 성과가 없느냐”는 것이 의원들의 단골 질문이고, 정부가 바뀔 때마다 과학기술 투자의 효율성 제고가 주요 국정과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정량적 지표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투자 성과는 전반적으로 선진국에 비하여 뒤떨어지지 않는다. 연구비당 논문 출판 수나 피인용횟수, 특허 출원 수나 등록 숫자 등은 모두 세계 10위 안에 들며, 다른 선진국들과 대동소이하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대학들의 논문 성과는 선진국 대학들과 어깨를 겨누며, 기업들의 특허 성과도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위치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IT, 자동차, 조선 및 방위산업 등 많은 분야에서 세계적인 산업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동안의 과학기술투자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다만 기술무역수지는 아직도 적자여서,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선진국보다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 R&D의 역사가 일천하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고, 다행히 기술무역수지도 최근에 와서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 R&D 투자의 효율성이 낮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도 노벨상 등 눈에 띄는 기초과학의 성과가 없고, 미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연구에서 시작된 인터넷 기술처럼 획기적인 산업기술을 개발한 사례도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최고급’ 성과들이 부족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큰 약점이다. 연구논문의 숫자는 많아도 세계 학계가 알아주는 독창적인 논문의 숫자는 부족하고, 특허의 숫자는 많아도 기술 발전의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는 ‘원천 특허’의 숫자는 적은 것이다. 선진국에 들어선 우리나라로서는 꼭 해결해야 할 과제이고, R&D 효율성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개선해야 할 점이다.

왜 우리는 이런 ‘최고급’ 성과가 부족할까. 최고급 성과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독창적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런 독창적 아이디어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패하기 쉽다. 아주 예외적으로 성공할 때 세계적인 ‘최고급’ 성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수많은 아이디어 중에서 성공 가능성이 있는 과제를 어떻게 찾아낼까. 미국의 국방성이나 이스라엘은 이 어려운 문제를 통찰력 있는 전문가들에게 전권을 맡기고 과제가 실패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 시스템을 도입해 해결하였다. 전문가가 최선을 다해서 판단하고, 혹시 실패하더라도 용인되는 분위기에서 세계적 최고급 연구 성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정부 연구개발 사업에서는 이런 방식을 도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행정 시스템은 전반적으로 ‘관리 위주’이고, 상호 신뢰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패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도전적인 과제를 지원하겠다고 2010년에 도입한 연구의 ‘성실 실패’ 제도가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일이 우리 행정 시스템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을 관리의 틀 안에 가두는 시스템에서는 세계적인 연구 성과가 나오지 못한다. R&D 사업의 특성에 맞게 관리보다는 신뢰에 기반한 지원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만일 행정 체계상 R&D 사업 전체를 그렇게 바꾸기 어렵다면, 총 30조원 규모인 R&D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규제 샌드박스’처럼 규제에서 자유롭게 풀어주면 좋겠다. 이번에 R&D 사업에 대해서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해 준 것처럼 말이다. 이런 혁신적 조치가 없다면, “도전적인 R&D는 돈이 얼마가 들어가든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은 기대하는 성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